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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그 형상과 마주친 순간, 전율을 느꼈다. 첫눈에 반한다던가, 그런 물렁하고 달큰한 느낌과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거리를 둔 충격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맹수를 눈앞에 둔 압박감과 닮아 있었다. 과시하듯 드러낸 팔뚝에 새겨진 문신이나, 딱 맞게 떨어지는 정장...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좀 더 원초적인 부분. 태생부터 포식자의 그것인 수컷들이 내뿜는 위압감.

 

나름 일반인들 기준에서는 뒷세계라는 곳에 몸을 담고 있는 자신이지만, 수준 자체가 달랐다. 무기에 들어가는 부품 쪼가리를 만지작거리는 사람과, 그 무기로 사람 대가리를 뚫는 사람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전자인 입장으로서, 후자인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는 게 상책이다. 제 그림자를 밟고 가던 구두소리와, 흰 정장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치마츠는 예의 모자를 얼굴을 가릴 정도로 푹 눌렀다. 그에게 아주 집요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누구도 그라는 걸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반장 씨."

 

 

 

 


그렇지만 귀신처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면, 한숨 밖에는 남는 게 없었다. 방금 뭐라고 생각했더라. 후자인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게 상책이다. 물론 짧은 사이에 변화가 생겼을 리는 없다. 그러면 대체 이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치마츠는 아주 하기 싫은 것을 하는 표정으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네. 여기는 무슨 일로? 어김없이 며칠 사이에 익숙해진 얼굴이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러면 그의 표정에서 엿보이는 불만 따위는 가볍게 묵살한 채, 남자는 요구하는 것이다. 

 

 

"공장을 소개해다오. 번거롭겠지만 오늘도 부탁하지."

 

 

이는 며칠째 변하지 않는 레퍼토리이다.

[카라이치] Love trigger!

 

 


인생이란 원래 불합리함 투성이지만, 그래도 이제 한 번쯤은 내 마음대로 흘러갈 때도 되지 않았나. 만년 밑바닥 인생. 마츠노 이치마츠는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차마 밖으로 내뱉을 용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소심함이나, 그가 말하는 '한 번' 을 인생역전의 기회로 쓴다는 상상조차 못하는 점이 왜 그가 블랙 공장의 반장이 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아니었다면 '다른 마츠노 이치마츠'처럼 살았겠지.

 

 

 

 


어색함이 긴 까닭에 생각이 절로 길어진다. 좆 같은. 이치마츠는 몸서리쳐지는 기류 속에서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입술을 작게 뻐끔거리기까지 했다. 퍽이나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러나 이치마츠의 소심한 반항은 그것까지로, 차마 불만을 대놓고 토로하지는 못 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럴 포부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반장 따위를 맡고 있을리가. 대신하여 이치마츠는 앞장서 발걸음을 재게 놀릴 뿐이었다.

 

 

 

 

 

 

 

 


터벅, 터벅. 하는 발소리 뒤로 뚜벅, 뚜벅. 구두소리가 엇갈려 들려온다. 뒤를 따라오는 남자의 존재감부터, 흐르는 정적까지 무엇 하나 어색하지 않은 게 없었다. 슬슬 익숙해질 법도 한데.

 

 

"...어제는 2구역을 보셨으니, 오늘은 3구역을 안내... 해드리겠습니다."

 

"아아."

 

 

 

 


수긍하는 목소리가 묵직하다. 쿵, 하고 심장이 그 무게에 조여들었다. 

 

그것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정기적으로 있는 감찰이 끝나자마자 원래 있었던 공장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젊은 마피아 하나가 꿰차고 들어왔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공장의 소유자가 바뀌는 사건 정도는 이쪽에서는 일 축에도 속하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 이질적인 것은... 마츠노 카라마츠라고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공장직 따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온몸을 휘감은 정장의 재질하며, 예전에 목도했던 분위기 따위의 것들이.

 

 

 

 


그러나 이치마츠는 그 이상으로 별다른 생각을 갖지 않았다. 공장장 따위야 누가 되든 똑같을 뿐이고, 지금까지 거쳐간 공장장들은 공장에 신경을 쓰기는 커녕 다른 구멍으로 돈을 받아먹기에 바빴다. 실상 아무리 반장인 이치마츠라고 해도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아주 드문 것이다. 또는 앞으로도 드물 것이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카라마츠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공장에 방문했다. 이치마츠가 그 사실을 알게된 건 사흘째의 일로, 수상한 외부인이 있다는 직원의 부름에 의해서였다. 잔뜩 당황해 허둥거리는 이치마츠의 사과를 가볍게 넘겨버리고, 그는 대신 이치마츠에게 공장을 소개해줄 것을 요구했다. 

 

 

"...3구역은 보통 주차장과 물류창고로 쓰입니다. 생산라인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쭉 걸어가... 가시면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있어요."

 

 

그나마 마음이 편했던 때를 떠올리며, 이치마츠는 입에 붙어버린 설명을 기계적으로 쏟아냈다. 문제는 그게 벌써 세 번을 웃돈다는 거다. 각 구역에 대한 설명을 세 번. 공장에 찾아온 횟수는 아홉 번. 간단한 산수임에도 믿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가 3구역에 대한 설명을 세 번째 듣는 날이고...

 

길게만 느껴졌던 복도가 끝났다. 이치마츠는 간단한 숫자를 몇 번씩이나 헤아려보다 문에 부딪힐 뻔 했다. 가까스로 멈춰서, 바깥에 있는 물류창고로 향하는 문을 열자 쨍한 햇살이 눈꺼풀을 두드렸다. 자동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어두침침한 블랙공장에만 있다가 마주하는 햇살은 그에게 있어 지나친 자극이었다.

 


"분명 이쪽이었지. 그렇지 않나?"

 

 

 

 


문득, 두통을 자각했다. 그러나 원인은 분명 햇살 뿐만이 아닐 것이었다. 알면서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속마음을 숨기고, 뒤따른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압박감은 계속되고 있었다. 압박. 쓰레기가 선택한 것치고는 괜찮은 표현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주변에 관심이 없는 이치마츠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지금도 뒤통수에 시선이 느껴져, 구멍이라도 뚫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처음에는 단순히 착각인 줄로만 알았다. 꽤 높은 직위의 마피아치고는 성실하구나, 하고. 생각하던 때도 분명 있었다.

 

 

"여기에서 물건을 받거나 주거나... 합니다."

 

 

걸음을 빨리하자 설명이 제가 듣기에도 불친절해졌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걸 이치마츠는 알았다. 어차피 저 남자는 공장이 궁금한 게 아니다. 두 번째부터 흐릿하던 짐작은 어느덧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 증거로, 처음에는 그나마 경청하고 이곳저곳 둘러보던 남자가 지금은 제 뒤통수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용건이 뭐냐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물론 그런 베짱이 있을리가 없다. 상대는 마피아였고, 비위가 거슬린다면 제 두개골에 바람구멍을 뚫어주는 건 일도 아닌 사람이었다. 아직 더운 날씨지만 그건 사양하고 싶다. 과장을 전혀 보태지 않더라도 현실감 있는 생각이어서 뒷통수가 서늘해졌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식사시간 종이네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때맞춰 울리는 종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몰래 흘려보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점검이 있고, 한가한 이 형씨도 사라진다. 이치마츠는 오늘 처음으로 뒤를 돌아, 카라마츠의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긴장이 풀려 등골이 저릿하다.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려와서,

 


"잠깐만, 반장 씨. 오늘은 나도 그대의 근사한 점심에 함께할 수 있을까?"

 

 

 

 


그대로 내뱉을 뻔 했다. 도대체 뭐가 목적이냐고.

 

 

*

 

 

인생이란 원래 불합리함 투성이지만, 그래도 이제 한 번쯤은 내 마음대로... 되풀이한다. 이치마츠에게 그 제안을 거절할 권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삭이는 것처럼 부드러웠다고 해도, 권유인 이상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반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마피아와 근처의 벤치에 걸터앉게 되었다. 미처 감추지 못한 부정적인 심기가 이치마츠의 눈에 흘러넘쳤다. 그를 응시하는 시선만 없었다면 모자라도 내팽겨칠 기세였다. 이치마츠는 불편한 동행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벤치의 맨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터앉았다. 그 벤치는 재고를 쌓아두는 컨테이너 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었다. 여기를 알려주면 앞으로도 이 마피아를 만나는 게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나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조용히 지나가고 싶다. 벤치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다하는 이치마츠에게, 그러나 카라마츠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젠장. 불합리함.

 


"식당이 내부에 있는 걸로 아는데, 그곳으로 가지는 않는 건가?"

 

"...거기 음식은 맛이 없어서요."

 

 

그렇게 대답하는 이치마츠의 주머니에서는 볼품없는 주먹밥 하나가 튀어나왔다.

 

 

 

 


"설마 그것보다도?"

 

 

 

 


정말 경악하는 듯한 어조. 우와. 실례구만... 부실한 포장을 벗기고 한입 크게 베어물면, 그는 꼴에 어울리지 않게도 당황해 손사래를 쳤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으음... 웃긴 형씨다. 짙은 눈썹이 살짝 아래로 처지는 광경을 보며, 이치마츠는 잠시 적당한 말을 골랐다. 

 

 

 

 


"그야. 저는 명목상이나마 상사고... 신입들 중에서는 싫어하는 녀석들도 꽤 있어서."

 

 

짧은 문장은 그걸로 끝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집요한 카라마츠의 시선은 긴장된 숨을 내쉬는 입이 다물리게 두지를 않았다. 의외로군. 그들은 왜 반장씨를 싫어하지? 그런 질문을 받자 말문이 막혔다. 그가 물어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말 그대로의 사적인 영역이었다. 원래 우연찮게 밥을 먹으면 이런 것까지 물어보는 건가.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이치마츠는 그러려니 싶어 까끌거리는 입술을 축였다.

 

 

 

 


그는 신입들에게 때때로 필요한 이상으로 엄격한 편이다. 평범한 노동자가 대단한 걸 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기계는 정신을 다른 곳에 잠깐 빼앗긴 정도로 사람을 불구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후에는 모든 게 끝이다. 명색이 '블랙' 공장. 부상을 당했을 때 보상을 해주기는 커녕, 최저시급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사람이 몰리는 것은 그마저도 간절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치마츠는 운이 좋아 반장이라는 곳까지 승진했지만, 몇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연 없는 사람을 찾아보지 못했다. 직원들은 전원 사회의 잉여물이자, 가진 것 하나 없는 자들이다. 부상을 당해 이곳에서조차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짐작은 갔다. 신입들은 그런 위험이 큰 녀석들이었고.

 

 

 

 


이치마츠는 신입들의 교육을 담당한다. 그의 아래에서는 작은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과정에서 워낙 호되게 야단을 치다보니 눈만 마주쳐도 굳는 녀석들이 있다. 이치마츠도 충분히 이해는 갔다. 불편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는 정도로 물러질 만큼 상냥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휴식시간마저 강탈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말하는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공장을 설명받을 때와는 딴판이다. 이치마츠는 헛웃음을 띠면서도, 살짝 필요 이상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요지는 마지막 문장이었는데. 어째서 흐름이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종래에 그의 문장은 흐려져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는데, 이치마츠는 그럼에도 어딘가 부끄러워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야, 옆에서 열렬한 시선이. 

 

 

"...동정이라든지. 그런 형편 좋은 소리는 아니고... 나중에 잠자리가 사나우니까요. 뭐어. 그것 뿐만이 아니더라도, 이런 쓰레기랑 밥을 먹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검다."

 

 

 

 


말을 드물게도 많이 했다. 목소리는 그 몇 문장을 말한 것으로 갈라졌다. 이제 정말 무리다. 헛기침을 하고, 이치마츠는 바닥에 시선을 두었다. 너무 떠들었나. 극심한 후회감과, 그 사이로 짐승적인 스킨향이 훅 섞여들어와,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의자에서 떨어질 만큼 놀랐다.

 


"... 그런가. 착한 아이다."

 

 

예의 묵직한 목소리가, 형태를 가지고 머리 위로 떨어진다. 모자 위여서 무게감 외 다른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상냥하게 위를 두어 번 쓰는 동작은 그대로 말초신경을 두드렸다. 놀랐다. 정말 놀랐다. 고양이 귀가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어느새 한 입 남은 주먹밥이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뭐야, 이 사람.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시선을 마주치자, 급하게 손이 떨어졌다. 그가 한 말도 경악스럽다. 어딜 봐도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그딴 말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나 가서 하라고. 잘못 들은 건가 싶어지면, 제 페이스를 찾은 시원한 웃음이 그걸 부정했다. 

 

 

 

 


"이런. 아기고양이의 심장에는 조금 무리였나? 실례였다면 미안하군."

 

"무, 슨."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매도하는 듯한 말은 좋지 않아."


웃, 하고. 무언가 항변하려 내뱉어진 숨은 차마 소리가 되지 못하고 흩어진다. 그런 이치마츠에게 최후의 선고가 떨어졌다.

 

 

 

 


"무엇보다 이 내가 있지 않나! 앞으로 반장씨의 근사한 점심시간에는 항상 내가 있어주지."

 

 

 

 


좆 됐다.

 

 

*

 

 

일방적인 선언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하듯, 남자는 그 뒤로도 매일 이치마츠에게 찾아왔다. 항상 그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음식이 든 봉지가 걸려 있게 되었다. 한가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 분명 공장장 나부랭이 따위에 머물러 있을 위인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한가로울까, 의문하고. 곧 예전과는 달리 단정하게 팔을 덮은 파란색 와이셔츠를 보며 납득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나, 반장 씨?"

 

 

 

 


요양 차원이라던가. 그런 명목으로 이곳을 맡게 된 거겠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옷주름이 펴져 부자연스럽다. 이치마츠는 왼쪽에 달려 있는 그의 권총 홀스터를 한 번, 도시락을 내미는 그의 오른손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언제쯤 이 형씨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까. 이치마츠는 그 점에 대해 셀 수도 없이 불평했지만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결코 자신의 몫까지 준비된 도시락 때문은 아니다.

 


"매번 생각하는 건데. 반장 씨는 자신의 몸도 더 챙기는 게 좋아. 팔목이 안쓰러울 정도로 가늘다."

 

 

 

 


물론 그런 낯간지러운 말 때문도 아니었다. 좆 됐다.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계란지단을 입안에 넣으며 이치마츠는 생각했다. 좆 됐다. 무심코 입을 벌려 음식을 그대로 받아먹게 된 날도. 사용하기 좋게 손질된 고양이 통조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게 된 날도 그랬다.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좆 됐다. 이는 예상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게 한 달을 넘어섰을 무렵. 이목구비 짙은 얼굴이 생소하지 않을 때부터, 결심했다.

 

 

 

 


피하자. 피해야 한다. 진창에서 수없이 구르며 발달한 직감이 그렇게 속삭였다. 이치마츠는 이번에도 그것을 따랐다.

 


생각의 정리는 빨랐고, 즉각적이었다. 자유시간 동안 누구를 만날 수도 없게 잔업의 양을 대폭 늘렸다. 원래도 여유가 있는 일정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정말 최소한의 생리현상만 해결할 수 있는 정도였다. 카라마츠가 찾아오면 바쁘다는 말로 보내버렸다. 이치마츠는 밤늦게 돌아간 숙소의 문 앞에서 차갑게 식어 덩그러니 남겨진 도시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잔뜩 멋들인 필기체로 무언가 써져 있던 포스트잇은 읽지도 않고 그냥 버려버렸다.

 


필요한 만큼의 잠도 자지 않고 기계를 돌리다보면 다른 노동자들의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저러다 저 사람 쓰러지는 거 아니야? 반은 멸시, 반은 걱정이었다. 그나마도 이치마츠에 대한 순수한 걱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저 양반이 없어지면 누가 그가 하던 업무를 대신할 것이며, 신입들 교육은 또 어떻게... 그러나 그 말들은 보이지 않는 막에 튕겨나가듯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이치마츠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무미건조하고, 

 


'착한 아이다.'

 


착한? 

 


그건 누구한테 하고 싶은 소리야.

 

 

문득 정신이 아득해진다고 생각했다. 검은 구두가 만들어내는 뚜벅이는 소리, 흰 정장이 펄럭이는 소리. (그게 실제로 들릴리는 없다만). 파노라마처럼 정신없이 뇌리를 스쳐간다. 순식간에 눈이 뻑뻑해졌다. 피곤해. 쉬고 싶어. 정규적인 감찰은 언제나 성가시지 그지없었다. 이치마츠는 공장장의 뒤룩뒤룩 살찐 엉덩이가 유연하게 흔들리는 것에 감탄하며, 그러나 귀한 광경 앞에서도 졸린 눈을 평소보다 더 자주 깜박이고 있었다.

 

 

 

 


졸음이 누르고 있는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때가 꼬질하게 낀 자신의 운동화다.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방 한 켠에 있는 이불과 운동화는 똑 닮아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이치마츠는 단지 그 이불에라도 몸을 뉘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피곤해. 졸려. 푹 눌러쓴 모자 덕분에 길다란 그림자가 졌다. 

 


아. 그 다음의 장면을 알고 있다. 

 


그림자보다 검은 구두. 흰 정장과, 그 뒤를 따르는 파란색 와이셔츠. 처음으로 그 형상과 마주친 순간, 전율을 느꼈다. 첫눈에 반한다던가, 그런 달큰하고 물렁한 느낌과는, 달라야만 할.

 

 

이치마츠의 시야는 암전했다. 

 


현기증이 잠시 일었다고 생각한다. 이치마츠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잠깐. 내가 눈을 감고 있었나? 꼬질하고 낡은 운동화 대신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탁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동떨어진 위화감을 느낀다. 낡고 좁은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잠든 기억이 없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핏 꿈이라고 생각했던 광경은 꿈이 아니었다. 수초가 지나자 희뿌옇던 시야가 제 궤도를 찾았다. 마호가니 탁자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부정하는 이치마츠를 질책하기라도 하는듯이 나무결의 광택이 매끄럽게 빛났다. 역시나 내 방이 아니다. 이치마츠는 그걸 깨닫자마자 괴상한 비명을 목구멍 안으로 욱여넣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 깨어났나?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군. 반장씨. 이게 몇 개로 보여?"

 

 

고양이를 유혹하는 생선처럼 흔들리는 무언가가 눈을 가린다. 정신을 도통 차리기 힘들었다. 고장난 것처럼 사고가 뱅글뱅글 돈다. 짙은 스킨향에 겨우 돌아온 의식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 이치마츠는 무의식적으로 두 개. 대답하고서야 느긋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풀어 헤쳐진 목덜미에는 굵은 금목걸이. 

 

순금이 발하는 광택은 책상의 것보다 요란했다. 그 밑으로 내려가면 와이셔츠의 깃에 걸린, 마찬가지로 광택이 도는 선글라스가 하나. 이런 난해한 패션을 선호하는 사람은 드물다. 적어도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오직 한 명이다. 망할. 이치마츠는 체념했다.

 


"여기는 어떻게..."

 

"논, 노논. 정확히는 쓰러진 반장 씨를 내 방으로 데리고 온 거다. 내 방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사무실이지만 말이지."

 


자신 있게 펼쳐진 손가락을 무시하고, 좀 더 자세히 둘러보니 확실히 아예 모르는 곳은 아니었다. 세 달에 한 번 정도 복잡한 문서들을 제출하러 오는 장소다. 블랙공장 내부에서 제일 크고 제일 상태 멀쩡한 방은 당연하게도 공장장의 차지였다. 처음에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아마 전보다 깨끗해진 풍경 덕분이다.

 

벽지가 새로 발렸고. 의자의 칠도...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는 이치마츠에게 카라마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한마디를 던졌다. 이 남자는 항상 이런 식이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가 이치마츠에게 대수롭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기라면 마음대로 써도 좋아, 마이 스윗 키티."

 


"뭡니까? 그 호칭은."

 


"으응? '리틀'을 붙이는 건 반장씨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서. 역시 그게 좋을까? 나와 의견이 같았군! 마이 스윗 리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 자식아. 이치마츠는 욱하는 심정을 억누르고 한숨을 가까스로 호흡에 흘려보냈다. 카라마츠가 언짢은 기분만 아니었어도, 그간 카라마츠를 자주 접해 간이 조금 배밖으로 튀어나오게 된 이치마츠는 항의의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평소와는 다른 서늘한 안광이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왜 나를 피했지?"

 

"피한 게 아니라. 그간 바빴던 거 아셨잖슴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시간도 없었던 건가? 정말로?"

 

 

카라마츠의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가 이치마츠에게 대수롭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전신의 체온이 순식간에 올라갔다. 모자가 없는 게 원망스럽다. 푹 눌러썼다면 조금이라도 얼굴을 가릴 수 있었을텐데. 스트레이트를 직격으로 맞은 기분에 이치마츠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분명 몇 번이고 짐작은 해왔던 상황이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이치마츠에게는 불행하게도, 현실과 상상의 괴리는 생각보다 컸다. 

 

언제부터? 질문해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돌려줘도 알 수 없다. 감찰에서 일방적으로 얼굴을 봤을 때부터? 이름을 소개받았을 때부터?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카라마츠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었다. 

 

 

 

 


"왜 그런 표정인가. 나를 향한 수줍은 마음을 들켜서? 이런... 눈을 떠줘. 대답을 듣고 싶지도 않은 건가?"

 

"그쪽은 뭐, 좋다고 대답하겠죠. 왜냐면,"

 


예상처럼. 마주한 그의 얼굴이 너무나 상상 속과 똑같았기 때문에.

 

애정을 연기하기에는 지나치게 재능이 없는 사람이다. 이치마츠는 갑작스럽게 울기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남은 여유를 필사적으로 쥐어짜내, 각본을 보며 읽듯 유려하게 이어지려는 말의 허리를 잘라냈다. 

 


"닮았잖습니까. 그쪽이 사랑하는 사람과."

 


몇 번이고 연습했는데. 떨리는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자조가 새어나왔다. 정말 어떻게 해도 구제불능인 녀석이다. 이치마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의식은 아직 선명한 기억 속을 부유한다.

 

카라마츠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날의 감찰을 기억하고 있다. 과시하듯 드러낸 팔뚝에 새겨진 문신이나, 딱 맞게 떨어지는 정장. 태생부터 포식자의 그것인 수컷들이 내뿜는 위압감. 파란색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는 온통 새하얀 남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이치마츠는 맹목적인 충성과 사랑을 읽어냈다. 자신은 결코 가져본 적 없던.

 

검은 구두가 이치마츠의 모자가 만들어낸 그림자를 밟고 지나갔다. 뚜벅. 하얀 정장이 펄럭이는 소리를 들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이치마츠의 시선이 그들을 스쳤다. 그리고.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페도라 아래의 얼굴은, 놀랍게도 자신과 똑 닮아 있었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둘은 달랐지만, 얼굴만큼은 그랬다. 

 

 

 

 


이치마츠가 카라마츠를 기억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들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감찰에서 서로를 발견했을 때. 새로운 공장장이라며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부터 집요하게 달라붙던 시선. 카라마츠는 모조품일지라도 그를 열망했고, 이치마츠는 애정을 갈구했다. 거래는 맞아 떨어졌다. 둘은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그러나 이치마츠가 카라마츠를 좋아함으로써 그 관계는 깨졌다. 애초부터 모래성 같이 연약한 끈이었다.

 

 

"알고 있었던... 건가."

 


"미안하게도. 그렇게 멍청한 녀석은 아니라서 말이야."

 


히힉. 하면서 입꼬리를 끌어당기자, 카라마츠는 한 방 먹은 표정이 되었다. 그게 이치마츠에게는 못내 유쾌했다. 아무것도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잠시나마 만족할 수는 있었다. 

 


"들킬 마음은 없었는데. ...예. 맞습니다. 젠장맞게도 그쪽을 좋아하지만... 어차피 쓰레기의 사랑. 더 바라는 건 없으니 마음껏 경멸하십시오."

 


진심 반 거짓 반이 섞인 말은 종전의 카라마츠 만큼이나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이치마츠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쓰레기라도, 유일하게 하나 남은 자존심을 잃고 싶지는 않다. 경멸하라는 건 반쯤 거짓. 더 바라는 게 없다는 건 완벽한 진심이었다. 상호간의 욕구 충족원. 대역으로 받는 애정조차도, 이 남자의 것이라면 과분하다.

 


"처음부터 알고 시작했으니까. 그쪽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없을 거고. 이 거래, 서로에게 이득이니 그대로 진행합시다."

 


"오, 오우..."

 

 

그렇게 말하며 이치마츠는 흐릿하게 웃어보였다. 미소라기보다는 근육의 움직임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 스스로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뭐 어떠랴. 연인도 아니고, 단순히 거래상대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심장이 무겁게 조여왔다. 그러나 괜찮을 것이다. 괜찮아질 것이다. 이치마츠는 그 마음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방아쇠를, 당긴다.

 

 

"그럼. 오늘은 이만."

 

 

어디선가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귀가 먹먹해지는 소리에, 이치마츠는 어떠한 것도 들을 수 없었다.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작게 공기 사이를 맴돌던 카라마츠의 목소리도. 때문에 앞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질 모든 일들을 , 그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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