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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 The Sea

 

Write by. naive

파이세 AU
파일럿 카라마츠 X 정비사 이치마츠

 

 

 

 

 

 

 


 파락파락 흩날리는 종이꽃 사이에서 소년은 무릎을 굽혔다. 두 사람을 비추는 눈부신 조명 아래, 그는 살풋 손가락을 잡아 포개 뜨거운 입술을 손 등에 맞췄다. 바닥을 쓰는 부드러운 멜로디가 찬란하고 애잔한 시선에 공중에서 얽혀들었다. 그건 마치, 그래, 시간이 속도를 늦춘 것처럼 보였다. 영원처럼 긴 입맞춤이 소리도 없이 끝나고 뒤이어 찬찬히 열린 그의 입술에서 눈물 젖은 목소리가 흘렀다.

 

「아아, 드디어 만났군. 그대를 기억하고 있소.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마음 착한 그대여. 부디 나의 성까지 함께 와주오.」

 

 기쁨을 못 이겨 흘러넘치는 소년의 눈가를 훔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롯이 나만 바라볼 것 같은 순진한 눈망울은 이야기가 넘어가면 시선을 돌리겠지. 그리고 슬픔에 못 이긴 가엾은 인어공주는 끝내 물거품이…….

 

 

 

*

 

 

 

 

 

 

 

「야옹-.」

 흐붓한 달빛이 창을 타고 스며들어 발치에 떨어지고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손이 여전히 얼어붙어 이불을 구긴 채 놓을 줄 몰랐다. 턱 근처에서 막혀 있던 숨을 한 번에 토해내고 찬바람이 폐를 조일 때까지 몇 번이나 심호흡을 반복했다. 창 너머로 시선을 돌리니 그를 꿈에서 끌어내린 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맞았다. 고양이는 은하수를 담은 새파란 눈동자를 조금도 동요치 않고 지그시 맞춰오다 이내 조그만 울음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치마츠는 멍하니 시선을 거두고 식은땀을 훔쳤다. 한산한 방이었다. 열 평 남짓의 조그만 방에 가구라고는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가 고작이었다. 작은 창을 타고 들어온 달빛의 스테이지를 배경으로 꿈속의 공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인어공주는 끝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말이 정해진 비극적인 사랑이야기. 고등학교 때 인어공주 역의 친구가 다리를 다쳐 딱 한 무대만 대타를 뛴 적이 있었다. 대사가 없는 역이라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오는 친구를 거절할 용기는 당시의 그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잊어버리고 있었을 텐데.

 

 빛처럼 화려하고 깃털처럼 포근했던, 다정한 목소리의 상대역은 당시 연극부의 부장 마츠노 카라마츠였다.

 

 

 

 

그래서 그런 옛날 꿈을 꾼 걸까.


그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한다며 뻗어온 손을 내치고 달아난 게 어느새 팔년 남짓이 되었다. 메아리처럼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를 떨쳐버리려 이치마츠는 휘적휘적 고개를 털었다.

 

-바람 쐬고 싶어.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선 탓인지 눈앞이 일순 검게 물들었으나 잠시 움직임을 멈추자 이내 돌아왔다. 제대로 밥을 차려 먹지 않은지도 어느덧 두 해를 훌쩍 넘겼다. 기립성 저혈압이 자리 잡은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 몰랐다. 구부정한 허리를 길게 빼 돌려가며 몸을 풀었다. 새벽 4시경,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하품을 멈출 방법은 없었다.

 

「사랑하고 있다, 이치마츠」

 


 매일 같이 떠올려도 싱겁지 않았다.
 홀린 듯이 그만을 바라보는 저에 놀라 괴로웠던 학생 시절, 십여 년을 보답하는 단 하나의 사랑의 말이었다. 물론 속에 든 건 진심이 아닐 것이다. 상냥한 그가 베푸는 조그만 동정심. 형의 배려. 그러나 그가 내려 준 동아줄이 금 동아줄이든 썩은 동아줄이든 이치마츠는 자신에게 잡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사랑하고 있으니 사랑해 달라니. 아, 이 얼마나 이기적인 말인가. 겨우 그런 이기심으로 사랑하는 이를 지옥으로 이끌고 얽맬 용기가 그에겐 없었다. 그가 떠나는 것보다 그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는 기적 같은 일은 동화도, 만화도 아닌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하물며 그와 이치마츠는 동성이었고, 그 이전에 가족이었다. 만일 그 모든 것을 딛고 넘어간다 할지라도 같은 얼굴이 여섯이나 있는 그 집에서 자신을 선택할 이유 따위 아무것도 없다고, 이치마츠는 생각했다.

 

 

 

 

 결국, 그런 것이겠지.
 눈치채고 말았던 것이겠지.

 

 터질 듯이 눌러 담은 연정은 넘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자물쇠는 아주 오래전에 망가져 이치마츠는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마음을 숨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계를 느끼고 더 이상 숨기기 어렵겠다 자각하던 중, 거짓말처럼 카라마츠는 말했다.

 

 

 

 

 

 

 

-이 마음은 형제인 마츠노 이치마츠를 향한 것이 아니야.


-그저 내 앞의 그대에게 카라마츠라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전하고 싶었다.

 


-그대를 사랑해.

 


-사랑한다, 이치마츠.

 

 

 이치마츠는 생각했다. 어깨 위로 부서지는 별빛에 흠뻑 젖어 멍하니 생각했다.
꿈인가. 환상인가. 진실인가. 진심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거지? 내가, 내가 만약 여기서 좋다고 해버린다면....... 그는 무슨 생각인 거지?

 


 시간을 달라고 했다.
 머리까지 산소가 돌지 않는 기분이었으니까.

 


 밤을 새워서 고민하고, 몇 번이고 상상을 덧그리다 결국 내린 결론은 집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가 진심이라면 그 결단은 터무니없이 잔혹한 일이 되겠지. 하지만 그런 희미한 확률에 기대어 줄을 잡기에는 제 형이 너무도 가엾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이란 변하는 법이다.
 떠나기만 한다면 엇나간 마음은 식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면 언젠가는 서로의 결혼식을 웃으며 축하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카라마츠가 생각하는 것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단순히 금방이라도 떠나 버릴 것 같은 이치마츠를 막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치마츠는 당장에라도 자신이 카라마츠의 곁을 떠날 필요가 있다고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8년

 

 

 가족과는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연락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표시로 종종 아무것도 쓰지 않은 편지를 집으로 보냈다. 몇 시간 붙잡고 있어도 편지는 백지인 채였기에 단념하고 보내는 메시지였다. 그저 나는 잘 지낸다는 의미만 닿는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좋았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는 아무렇게나 썼지만, 필체 정도는 알아보겠지. 여하튼 몇 년을 끈질기게 붙어 자란 형제들이니까.

 

자격증을 딴 날, 취직을 한 날, 첫 월급을 탄 날.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기쁨을 나눌 상대가 없다는 건 외로운 법이었다. 펜을 들었다 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 결국 보내는 건 새하얀 빈 편지 한 통.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제대로 된 사람이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완전히 잊었어.

 

 

 

이제 나는 괜찮아.

 

 

 

그렇게 믿었었는데....

 

 

 

 

 

 

 

 

 

 


 소금기 묻은 바닷바람의 짭조름한 냄새가 콧속을 후볐다. 짙게 드리운 아침 안개가 착잡했다. 먼동이 트는 새벽, 구름이 오색으로 찬란히 빛나 분위기에 취해 허우적대던 때. 벼랑 끝자락에서 얼핏 흐릿하게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가볍게 넘겼을 것이다. 아니, 그날도 가볍게 넘길 생각이었는데.... 바람결에 들려온 이름이 너무나 익숙해 그만 멈춰 서고 말았다.

 


 「이치마츠」

 


  다정한 목소리였다.
  잊은 줄로 알았던, 그러나 잊을 수 없었던.

 


 "카라마츠?"

 


 목소리가 새어나간 건 순식간이었다. 쿠소마츠도, 카라마츠 형도 아닌 카라마츠. 어릴 적 써오던 호칭이 자연스레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뒤늦게 뉘우치고 서둘러 해무 속으로 달렸을 땐 이미 늦어, 뻗어 나온 손에 팔을 붙잡히고 난 뒤였다.

 


 "진짜..., 이치마츠..., 인 건가"

 


  안돼. 지금은 안돼. 오늘은 안돼. 아직은 안돼.
  나는 너를 잊지 못했어.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좀처럼 생각대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자유로운 반대 손으로 턱밑의 마스크를 코 위까지 끌어올렸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최대한 목소리를 내리깔고 혹여 들키진 않을까 고개를 푹 숙였다. 동요한 마음이 자꾸만 새어나가 실수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연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이치마츠, 그리 달아나지 말아줘. 가족들도 그리워하고 있다. 돌아가자."

 


 사람 말을 듣지 않는 버릇은 여전한지 잘못 봤다는 대답을 깨끗이 무시하고 카라마츠는 그렇게 외쳤다. 그는 완전히 자신이 잡은 청년을 이치마츠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손을 떨쳐날 수만 있다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 방을 비우고 이 동네를 떠날 텐데.

 

 

 

 

 무엇을 위해 8년이나 피해 다녔는가. 제 더러운 욕망에 사랑하는 형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는가. 상냥한 형이 베풀어준 배려를, 동정을, 독처럼 달콤한 '사랑해'를. 전부 덮어버리면서까지 달아난 이유가 무엇이었나. 언젠가 그가 거짓말에 지쳐버렸을 때,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떠나고 싶어졌을 때, 그의 발길을 잡는 장애물만큼은 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닌가.

 

 

 

 


  이런 곳에서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치마츠!"

 


 어떻게든 떨치기 위해 힘껏 내치자 덥석 등에 닿는 따뜻한 것이 있었다. 포개지는 느낌에 몸이 굳었다. 뒤에서 가슴을 둘러 안기고 귓가에 닿는 따뜻한 입김이 오싹했다. 힘도, 말도 잃고 얼어붙자 나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전부... 전부 잊었다."

 

-브라더

 


 귓바퀴를 타고 스미는 목소리가 심장을 찔러왔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검게 울렁이며 소용돌이쳤다. 정체 모를 그 감정은 분노와 닮아있으면서도 슬픔과 매우 유사했다. 이치마츠가 8년간 매달려온 단어를 고작 '잊었다' 한 마디로 카라마츠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있었다. 울컥 솟은 것은 송곳처럼 날카로운 비틀린 웃음이었다.

 

 "하, 웃기지도 않은 소리 작작해"

 

-아니, 잊었다.

 

 

 단언하는 목소리는 감정 없이 담담해 후벼지는 고통에 발목이 잠겼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허탈함에 짓눌려 침묵이 자욱하게 깔렸다.

 


  결국,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까.

 

 

 

 


 "......그래"

 

 더듬더듬 짚어 가면 어디서부터 후회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멀었다. 말 한마디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했고 더는 바라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앓아온 기간은 더 이상 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길었다. 그를 사랑하고 만 것을, 집을 떠나고 만 것을 후회할 수는 없었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잊었다'라고 말했을 때, 얄궂게도 이치마츠는 깨닫고 만 것이다.
 과거에는 알 수 없었던, 자신이 집을 나온 또 하나의 이유를.

 

-사랑한다, 이치마츠

 


 그는 그 말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썩은 동아줄이 언젠가 끊어지듯 동정으로 시작한 사랑은 머지않아 떠나가겠지. 그래서 이치마츠는 집을 떠나온 것이다. 집을 떠나 달아난 것이다. 카라마츠가 자신의 고백을 무로 돌리는 것이 두려웠기에. 그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무서웠기에.

 그는 자신이 없는 곳에서 찬찬히 감정이 식어가길 기다린다는 무르고 잔혹한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다.

 

 

  아, 어쩌면 이리도 어리석을까.

 

 

 

 

 

 

 

 결국 그는, 이치마츠는 자신이 선택한 길의 끝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것이었다. 과거에 멈춰 끊임없이 속삭이는, 이제는 무효해져 버린 카라마츠의 '사랑한다'를 제외하고서.

 

 "그렇겠지. 뭐, 이상한 일도 아니야. 가족이고. 동생이고.... 이런 쓰레기를 사랑했다는 것 자체가 네 입장에선 흑 역사 같은 거겠지. 오히려 당연해. 쿠소마츠가 했던 말이니까 겨우 그 정도의 무게...."

 

 꾸역꾸역 뱉어낸 건 한심한 저를 비웃는 말이었다. 겨우 그따위 것을 지키겠다고 달아난 자신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잊었다.' 한 마디로 사라지는 공허한 말 따위를.

 

 기어가는 목소리로 히죽거리며 중얼거림을 이어가다 문득 팔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입을 막았다. 허리를 숙이며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도 잡힌 팔목은 빠져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과 함께 터져 나온 것은 공포였다. 힘껏 반댓손을 휘둘러 제 뒤의 형을 후려치고 이치마츠는 얼어붙었다. 저릿하게 울리는 주먹을 적시는 선홍색 핏자국의 주인은 눈물을 도륵도륵 쏟아내며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미간에 깊게 인상을 새기고 입술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이를 물고 있었다.

 

 "뭐야, 이제 와서.... 왜 우는 건데.... 아픈 거야? 아니면.... 몇 년 만에 만나도 다짜고짜 피하려 들고 주먹질하는 동생이라... 혐오하게 됐어?"

 


 "이치마츠!"

 

 천천히 고개를 떨구고 팔의 힘을 빼자 현기증이 돌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죽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다시 만나면 이제 전부 잊었다는 듯 방실방실 웃으며 어두웠던 자신을 덮을 계획이었다. 그동안의 고뇌를 전부 흑 역사 취급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함을 연기하려고 했었다. 비록 자신은 아니지만, 그동안 그렇게 오랫동안 카라마츠를 혐오하는 흉내를 내왔다. 그것에 비하면 평범함을 연기하는 것 따위 간단한 일임이 틀림없었다.

 

 

 

 


그게,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세찬 파도소리와 한 치 앞도 분별할 수 없는 해무 속에서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와 마주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덮쳐온 카라마츠를 피하지도, 견디지도 못하고 이치마츠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그대로 카라마츠의 무게를 못 이겨 바닥에 뻗어 둔탁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마 위로 따뜻한 입김이 닿아왔다. 시선이 부딪힐 여유도 없는 근접거리였다. 양 귀 옆에서 무게를 버티는 카라마츠의 손은 바닥을 쥐어뜯을 요량인지 으득으득 힘이 들어가 섬뜩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다. 이.., 이 몸은....., 진심으로..., 윽, 하지..,만..., 네가 달아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까지 싫어할 거라고는..."

 

 따뜻한 액체가 입 근처를 적셔 와 이치마츠는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천천히 혀를 내 핥으니 짭짤한 액체가 혀를 자극했다. 시선을 끌어올린 끝에는 카라마츠가 떨고 있었다. 추워서 떠는 것은 아니었다. 아파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치마츠는 반쯤 뜬 고요한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뺨을 감싸고 엄지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자 이유 없이 콱 목이 메 공기를 삼켰다.

 

 

 

 

 눈을 본다고 사람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을 리 없다. 표정을 읽는다고 마음속까지 알 수 있을 리 없다. 연극 부인 그에게 이 정도 눈물연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간단한 일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알아 버릴 것 같았다.

 

- 그는 진심이야.

 

 찌릿찌릿하게 보내오는 시선이 몸에 닿는 것만으로 기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치지 말아 달라는 애절한 표정 속에 끓는 듯한 짐승이 희번뜩한 시선을 정면으로 보내오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이치마츠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안았다. 고양이와 같은 모습에 이치마츠는 눈썹을 움찔 떨었지만 카라마츠는 끝내 뺨을 비비는 일은 없는 채 말없이 일어섰다.

 

 

 

 


-말해야 해.

 

 

 

 


 아아, 나는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누군가가 외친 것처럼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려왔다.

 

말해.

기회는 지금뿐이야.

말해. 말하라고. 좋아해. 좋아해. 나도 쭉....

나도.... 

 


나도.......

 

 

 "쿠소마츠!"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가 그렇게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긴장하면 혀가 굳어버린다는 걸 처음 느껴봤다. 온몸의 감각들이 숨을 토해내듯 바짝 일어섰다. 입술을 적실 침조차 말라 버려 버석거리는 입술의 맞부딪힘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사실은....."

 

 괜찮아, 이치마츠. 할 수 있어. 카라마츠는 좋아해 주고 있어. 좋아한다고 말해줬어. 그러니까 내가 전할 수만 있다면. 전하기만 한다면......

 


 "좋아했던 건 나도 마찬가지....."

 


 멈춰버린 문장의 끝맺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끝맺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목까지 붉게 달군 홍조를 식혀주던 선선한 바닷바람이 순식간에 칼날로 변한 양 귓가를 후드렸다. 눈앞의 카라마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다만, 쳐진 눈썹 아래 비스듬히 떨어진 시선이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는 건 확실했다. 카라마츠가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치마츠는 알 수 없었으나 비틀린 그의 미소가 깊은 슬픔을 못 이겨 새어나온 부산물이라는 것만큼은 알아챌 수 있었다.

 


 "카라..."

 "역시 이치마츠는 상냥하지 않은가."

 


 숨통을 조이는 묵직한 공기에 못 이겨 이치마츠가 입을 열자 도망치듯 카라마츠가 말을 끊었다.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알고 싶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늘진 옆 얼굴에는 공포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꾹 여문 입에서는 그의 허세가 너무나 잘 들어나 그제야 저가 저지르고만 잔혹한 짓을 이치마츠는 깨닫는 것이었다.

 


 "그런 점을 사랑했다. ...하지만 이치마츠, 날 위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어. 그런 일을 시키고 싶었던 게 아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좋아. 애초에 큰 기대를 품었던 게 아니다. 나는 쭉 네 형으로 남아 있을 테니까....."

 


 그건 아주 오랫동안 둘을 갈라놓았던 오해와 같은 것이었다. 상냥함에서 베푸는 동정이라는 제멋대로 지어 내린 결말. 과거의 이치마츠가 가지고 있던 그 착각을 이제는 카라마츠가 이어가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어떻게 말해야 전해질까. 누구보다 오래 앓아왔던 이치마츠였기에 더욱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술을 달싹이는 동안 카라마츠는 더 이상 화제에 머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인지 순식간에 분위기를 뒤엎으며 활짝 웃었다.

 

 

 

 


 "배고프지 않은가? 라면이라도 먹으러 가지."

 

 

 

 


 쾌활한 웃음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으나 그 가면 뒤에 숨어 있을 상처 입은 표정이 깊이 뇌리에 새겨져 이치마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비참한 기분만 더해가겠지. 아플 정도로 알고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

 

 "이치마츠, 준비가 끝났다면 슬슬 나가지 않겠나?"

 

 이치마츠와 카라마츠가 재회하고 두 달 남짓이 흘렀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이치마츠가 자취를 감추고 카라마츠는 공부에 매진했다는 모양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항공조종과를 나와 작년에는 외국으로 연수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이 마을에 온 건 항송사에 부기장으로 새로 취직해 자취방을 찾는 중이었다고 했다. 그 날 술잔을 홀짝이며 약간 쑥스러운 듯 말하는 카라마츠의 이야기에 이치마츠는 이 이상 크게 놀랄 수 없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야 카라마츠가 말한 그 항공사는 이치마츠가 항공 정비사로 일하고 있는 곳과 같았으니까.

 

나 거기 다녀.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하자 맥주를 들이켜는 카라마츠의 눈이 놀란 듯 조금 커졌다.

 

여기 근처 살고 있어.

 

 

 

 

 

 

 


-같이 살래?

 

 

 

 

 

 

 


 술김에 흘리듯 조심스레 말하고 반응을 살폈다. 이치마츠 입에서 먼저 동거제안이 나왔다는 걸 믿을 수 없는지 카라마츠는 놀란 표정으로 눈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를 짜증을 불러 저도 모르게 주먹을 내질러버린 이치마츠였으나 카라마츠는 코피를 쏟으면서도 기쁘게 제안을 받아들였고, 최종적으로는 출퇴근길과 잠자리를 함께하게 된 것이었다.

 

 

 

 


 "엉-. 가자."

 

 느릿한 발걸음을 질질 끌고 나와 바라본 카라마츠는 초연한 눈동자로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에게 고백한 그 시점을 기준으로 카라마츠는 한 번도 이치마츠와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이치마츠가 먼저 동거 제안을 했을 때를 제외하고.

 카라마츠는 쭉 그는 이치마츠의 눈을 바라보는 척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아직 이치마츠를 의식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나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종종 느껴지는 피부를 핥는 듯한 찌릿찌릿한 시선은 단순히 이치마츠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등골에 소름이 달릴 정도로 선명했다.

 

 

 

 

 그러나 정작 얼굴을 마주하면 좀처럼 시선을 맞춰주지 않았다. 결국, 이치마츠는 오해를 풀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여즉 카라마츠를 오해의 주박에서 풀어주지 못한 채였다.

 

 

-그날 전해질 때까지 말했으면 좋았을까.

 

 

 답을 찾을 수 없는 일을 근 두 달간 몇 번이나 후회해 왔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카라마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치마츠는 도통 읽을 수 없는 제 형의 속마음에 초조함만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작업이 늦어지면 마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주었고 무언가 하기도 전에 가사 전반을 맡아 처리해 주었다. 미안한 마음에 무언가 해보려 움직이면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지고 반강제로 돌려보내 지곤 했다. 분명 몸은 편했으나 반비례하듯 마음은 점점 불편해져만 갔다.

 

 

 

 

 오늘이야말로 고백하자. 나도 같은 마음이라고 가르쳐주자. 더 이상 참을 필요 없다고.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나도..... 나도 진심으로......

 

 각오를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그날 카라마츠의 상처받은 표정이 선명해져만 갔다. 입은 점점 더 떼기 힘들어져 가고 언뜻 평범한 듯 보이는 일상은 적응해버릴 것만 같아서, 차라리 이대로 계속 덮어 놓으면 언젠가 전부 없었던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마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저 녀석 엄청 열심히 공부했어.」

 

 

 

 


나른한 목소리로 키득키득 중얼거리는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머릿속의 무언가를 밀어내려는 것처럼 말이지.」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스미며 숨이 막혔다.

 

 「이치마츠는 그게 뭔지 알까?」

 

 

 

 


 카라마츠와 재회하고 얼마 후 정말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러 본가에 들린 날 들은 이야기였다. 말도 없이 나가 빈 편지만 보냈다고 부모님꼐 한 번, 쵸로마츠 형에게 한 번 연달아 혼이 나고 너덜너덜 진이 빠진 이치마츠가 혼자 엎드려 있을 때였다. 반쯤 뜬 눈으로 흘겨보던 오소마츠의 의미심장한 물음이 뇌리에 박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연심을 접지 못하고.

 

 

 그래, 카라마츠는 실패한 것이다. 그 바보 카라마츠가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공부했다. 그럼에도 그는 잊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영광스럽다고 해도 좋다. 이런 쓰레기의 어디에 그런 가치가 있다고 그렇게까지 하고 마는 걸까. 더 이상 '사랑해' 한 마디로는 부족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는 전해질 수 없는 감정이 삭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익어가는 감정을 전부 뱉어내지 않고 카라마츠의 마음을 여는 건 아마 불가능하겠지.

 

 

 

 


-그는 누구보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싶어 하니까.

 

 

 

 


 속에 쌓아둔 감정을 부딪치는 것뿐이었으나 '고작'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이치마츠에게 그건 너무 힘겨운 행위였다. 그리고 그 부담은 날이 갈수록 부풀어 올라 용기를 묻어만 갔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유달리 잡일이 많고, 언제나 그랬듯 카라마츠가 눈을 피해 이유 없는 권태감에 젖어 있던 날이었다.

 

 

 

 

 카라마츠가 진심인 게 어쨌는데? 우리가 서로 짝사랑 하고 있었다는 게 왜? 어차피 평생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도, 행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분명 언젠가는 질려 떨어지고 싶어 할 게 틀림없는데.

 

 

 

 

-어쩌면 이미 전부 식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차츰 머릿속을 물들여가던 참이었다.

 

 

 

 

 

 

 


 "요즘 테러리스트가 극성이래."
 "어머, 그래요? 불손한 세상이네."

 

 


 도담도담 들려오는 청소부 아주머니들의 세상 이야기를 배경음 삼아 마무리 조정의 미세한 작업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참, 맞아. 그거 들었어요? 스튜어디스의 토토코양이 고백을 했대요."
 "아, 들었죠. 상대가 부기장 마츠노 씨라지?"

 

 그 때의 감정을 감히 누가 대변해 줄 수 있을까. 쿵,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속을 후비는 듯한 소름 돋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비명을 질러댔다. 호흡을 추스르는 법을 잊은 채 뇌가 레일을 달리듯 사고를 가속했다.

 

 

 

 


 언제부터? 어째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거야? 나 몰래 사귀는 거야? 왜 말하지 않았어? 우리 딱히 사귀는 것도 아니지? 형제잖아? 말하라고. 아니, 톳티가 일일이 보고하는 편이 이상하다고 했던가. 형제니까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그게 뭐야.

 

어이, 쿠소마츠.

 

 

 

 


뭐냐고 그게....

 

 

 

 


그런 건......

 

 

 


-너무하잖아…….

 

 

 

   힉힉 넘어가는 호흡이 괴로워 가슴팍을 움켜쥐며 몸을 말았다.

 

 들어서 어쩔 건데? 웃으면서 축하해 줄 생각이야?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잘됐네. 잘 어울려. 행복하길. 상투적인 말을 읊조리며 손을 잡고 둘을 응원하겠다고? 가능하다고 생각해? 내가? 이 내가? 나 따위가?

 

 

 

 


   뺨을 타고 침이 질질 흐르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 제대로 마음을 전하지 않았지?

 


-그런 점을 사랑했다.

 


왜 제대로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지?

 


-하지만 이치마츠, 날 위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어.

 


왜 그를.....

 


-나는 쭉 네 형으로 남아 있을 테니까.

 

그런 오해를 하게 내버려 둔 거야.

 

 

 

   아아아, 하고 작게 오열 섞인 울음이 목 뒤로 쏟아졌다.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운 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괴롭고, 괴롭고, 그저 너무나 괴로워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의 너머로 고철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시야가 어둠에 삼켜지며 이치마츠는 데굴데굴 정신을 잃었다.

 

 

 

 


*

 

왕자는 이웃 나라 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왕자님 떠나지 말아요.

인어공주는 소리 없이 눈물만을 방울방울 떨어뜨릴 뿐입니다.

 

*


치직치직, 화면 너머로 카라마츠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 한 줌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홀린 것처럼 화면 너머 그에게 시선을 뺴앗겼다.

 


화면 밖의 나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낼 수조차 없었다.

 


'왜 일찍 눈치채지 못한 거야'

 


오래된 스피커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오며 화면이 깜박깜박 색을 바랬다.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어.'

 


화면을 깨고 나와 멱살을 잡은 건 꼴사납게 울고 있는 10년 전, 교복을 입은 나 자신이었다.
힘없이 늘어져 흔들리며 소름 끼치는 꿈이라고 생각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

 

 번쩍, 이치마츠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티 없이 하얀 천장이 노을에 물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이치마츠? 드디어 눈을 떠주었군. 몸은 좀 어떤가?"

 


 여전히 눈앞이 아질아질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처신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이치마츠는 손을 뻗었다. 더듬더듬 만져 본 눈앞의 남자는 틀림없는 제 둘째 형이었다. 묵직하고 단단한 그의 손이 아직 닿는 곳에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울컥 눈물이 솟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치마츠는 잠긴 입술을 열었다.

 

-좋아해.

 

 

 

 


 너를 좋아해. 쭉 좋아했어. 형제로서 좋아한다는 게 아니야. 네가 말한 좋아한다와 같은 의미야. 이제 와서 웃기다고 생각하지? 네 마음은 이제 여기 없을 텐데.... 경멸해도 좋아. 아니, 경멸할 수밖에 없지? 도망친 거 말이야. 싫어서가 아니었어. 너와 함께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야 그렇잖아. 우린 동성이고 형제이고 심지어 쌍둥이라고. 어떤 시선을 받을지 상상해 본 적 있어? 널 그런 지옥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어. 난 네가 날 동정해서 거짓말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때의 난 정말 여유가 없었거든. 네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 같아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네가 고백을 했어. 난 네가 내 마음을 눈치채고 선두를 쳤다고 생각했지. 그렇잖아. 넌 가족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니까. 내가 떠나려는 걸 막고 싶어서 거짓말을 친다고 생각했어. 그런 거짓말에 묶여 네가 네 미래를 포기할까 봐 무서웠어. 넌 평범하게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그 길의 걸림돌이 되는 게 싫었다고. 그래서 네가 다시 만나 날 좋아한다고 말해줬을 땐 꿈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야. 쭉 네 곁에 있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어. 하지만 그럼 안 되잖아. 우린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난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 다른 형제들도 말려들게 될 거야. 가족 중에 호...호모가 있다니... 더럽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사랑해, 카라마츠 형. 겨우 여자 친구가 생겼는데.... 이제야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이상한 소리 해서, 짐을 맡겨버리는 짓을 해서 미안해. 길을 막고 싶지 않다면서 달아난 주제에 이런 소리나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역겨워. 나 같은 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입이 막힌 건 한순간이었다.
 비스듬히 겹쳐진 입술을 타고 들어오는 온기가 정신마저 쓸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의식 중에 반걸음 물러서 보지만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따라붙어 오기에 조금씩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을 무렵, 이내 벽에 부딪혀 물러설 곳을 잃은 이치마츠는 그대로 주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넋이 나간 의식을 붙잡고 시선을 위로 끌어올렸다. 흉흉한 광채를 머금고 찔러오는 것은 실로 오랜만에 마주친 카라마츠의 시선이었다.

 

 

 

 


“……죽고 싶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째깍거리는 시계소리만 들려오는 침묵을 깨고 잔잔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지르고 말았다는 죄악감에 물든 말투는 뉘우침과 변명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무척이나 슬픈 색을 띠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윽한 눈빛이 내려앉자 이치마츠는 제 심장이 고장 난 듯한 착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키스하고 만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겠지. 키스. 그것은 충동적인 행위였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 그가 내비친 무의식이었겠지. 하지만 이치마츠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며 죄스런 마음에 허우적대는 카라마츠의 그런 모습마저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여자 친구라는 건 토토코 이야기를 들은 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라마츠는 쓰게 웃으며 제 앞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소문이란 빠른 법이군. 그녀는 내일 비행이 끝나고 돌아와 대답을 들려달라 했지만 사실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이치마츠는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관심도 없는 척 무표정을 띈 얼굴은 일말의 여유도 내비치지 못하고 있었다.

 

 

 

 


 “거절할 생각이었어. 난 네 곁에 있고 싶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네가 날 봐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좋았어. 난 단지 너를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설령 짝사랑에 불과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마치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듯 음조가 없는 읊조림은 조곤조곤 이치마츠의 귓가로 내려앉았다. 부풀어 오르는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기쁘다는 감정을, 행복하다는 감정을, 진심으로 느껴본 건 언제 이후였던가. 입꼬리를 말아 올릴 여유조차 없었다. 기쁨을 흘리는 법을 잊어 터질 듯한 심장만이 쿵쿵 날뛸 뿐이었다.

 

 

 

 


 “…토토코양과 사귀면서 나를 잊어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거야?”

 


 “하지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은 거다. 말했지 않나. 나는 너를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그러니까……”

 

 

 

 


 머뭇거리는 끝맺음에서 배어 나오는 분위기에 오싹 소름이 달렸다. 카라마츠는 얕은 심호흡과 함께 다시 각오를 다진 듯, 한결 힘이 들어간 모습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누군가와 사귀겠다고 해도 내가 반드시 그 길을 막고 말겠지.”

 

 

 

 


 그것은 이치마츠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미래를 막고 마는 것. 행복을 끊어버리는 것. 이기적인 그 결정을 자신은 서슴지 않겠다, 카라마츠는 그리 선언하고 있었다. 마음 약한 그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지만 말 뿐인 집착이라도 좋았다. 이치마츠는 괜스레 눈물이 차오르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제게 미움받을 각오를 다지느라 머뭇거렸다는 것에는 적잖이 웃음이 났다.

 

 “나쁜 형이네.”

 


 “……아아, 그렇지”

 


 물 먹은 목소리는 비슬비슬 약한 티를 내고 있었다. 잔뜩 배에 힘을 주고 허세를 부리는 평소를 생각하면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목소리였다. 미간에 깊이 인상을 새기며 입술을 깨물고 그는, 카라마츠는, 울고 있었다.

 

 

 

 


-거절할 생각이었어.

 

-네 곁에 있고 싶었으니까.

 

-단지 너를 사랑할 수만 있다면….

 

 

 아아,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섣불리 믿을 수 조차 없는 신이 내린 운수가 아닌가.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하고, 나는 그를 사랑한다. 불가능하리라 믿었던 일이 현실이 되어 다가와 지금 이 자리에서 웃음 짓고 있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행운이지만 더 이상 비틀어 보지 않는다. 그러기로 결심했다. 이 행운은 내게 찾아온 행운이며 나를 위한 행운이다. 받아들이고 충분히 행복을 만끽해 주기로 마음먹지 않았는가. 나누었던 모든 대화가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그의 진심이 손발이 뒤틀릴 정도로 부끄러웠다. 활활 타오르는 얼굴을 숨기지 않으려 애쓰며 벽을 짚고 일어섰다.

 

 

 

 


 “왜 우는 거야. 쿠소마츠 주제에.”

 

 

 

 


 언제나 앞서나가던 든든한 형은 눈앞에서 누구보다 가엾은 모습으로 훌쩍이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뻗어오는 가면의 뒷모습을 드디어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이치마츠…, 나…나는……”

 

 입술을 떨며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단어들은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허공에 먹혀 어물어물 사라져갔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왜 그렇게 겁을 먹은 거야. 쿠소마츠 주제에. 쿠소마츠 주제에.

 

 

 

 


 닮았지만 닮지 않은 그의 우는 모습은 꼭 10년 전의 저와 같이 느껴져, 어쩐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나 딱히 네가 나쁜 형이라고 해서 싫어지진 않았다고? 봐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댔던가……. 봐주는 게 아니야…. 쭉 보고 있었을 뿐…. 멍청한 동생이지?”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웃어 보이지만 표정이 일그러져 봐줄 만한 게 아니었다. 이치마츠의 그런 모습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젓고 카라마츠는 양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멍청하지 않아. 그대는 예나 지금이나 나의 자랑스런 동생이다.”

 

 

 

 


 가만히 포개지는 숨소리를 들으며 이치마츠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동생…이지."

 

 

 

 


씁쓸한 한 마디는 목이 멘 가운데 흘러나와서인지 쇳소리처럼 조용히 삐걱댔다.

 

 

 

 


 "아아, 동생이지만 사랑하고만 나를 용서해줘."

 

 

 

 


 놓아줄 생각은 없다는 듯 조금 더 힘을 주며 카라마츠는 어깨에 고개를 묻어왔다. 팔이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놓는 자신을 비웃으며, 이치마츠는 그의 허리를 감싼 채 멀리 달빛이 쏟아지는 창으로 시선을 맞췄다.

 

 

 

 


 익숙한 달빛이다.
 그 날 홀로 바라본 밤하늘도 저렇게 흐릿한 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문득 창밖으로 은하수를 닮은 눈동자의 까만 고양이가 스쳐 지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드물게 산책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더듬더듬 카라마츠의 등을 쓰다듬으며 달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언제나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대할 때 쓰던 그 말투였다.

 

 

 

 

 

 

 

“잠깐 나갈까?”

 

 

 

 


흐붓한 달빛이 창을 타고 스며들어 발치에 떨어지는 밤이었다.

 

 

*

 

 

 밤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고요했다. 밀려오는 파도가 어둠에 묻혀 검게 부서져 갔다. 짭조름한 바다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시커먼 바다와 시커먼 하늘. 마치 세상에 둘밖에 없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서늘한 밤이었다. 산산이 조각나는 파도의 파편을 쫓으며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는 말없이 발을 옮겼다.

 

-진짜…, 이치마츠…, 인 건가…….

 

 이치마츠는 멍하니 그날의 허상을 그리고 있었다. 팔을 잡히고 끌어안으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잡으려는 제 형을. 그리고 어떻게든 벗어나려 허둥대는 한심한 자신을. 그날의 자신으로서는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 지금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유성에도 빌지 못할 꿈속의 꿈만 같은 일이 말이다.

 

 불현듯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하는 소리였다. 눈을 흘겨 바라본 카라마츠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멍하니 바닥을 내려보고만 있었다.

 

 

 

 


“요 몇 달간…… 네가 눈을 피해서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

 

 생색내는 말투로 툭 던지자 카라마츠는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다 이내 고개를 떨궜다. 잘못했다고는 생각하고 있는 걸까. 오늘은 정말 드물 정도로 그의 약한 모습을 자주 보는 날이라고, 이치마츠는 생각했다.

 

 “그…그건 미안했다. 눈이 맞으면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너무나 의외인 대답에 귀 뒤쪽으로 열이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이치마츠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달의 차분한 은빛이 수면을 보드랍게 비추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을 것 같다니 뭘 말이야……”

 

 중얼거린 혼잣말은 파도소리에 씻겨 흘러가고 한산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얼굴을 때리는 착잡한 밤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금 바라본 카라마츠는 주눅이 들었는지 시무룩해 보였다. 언제든 멱살을 잡으면 눈물을 글썽이던 그였지만 이렇게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바람에 흔들리는 카라마츠의 앞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치마츠는 문득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짧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총총 뛰며 고통을 넘기는 모습은 평소의 카라마츠로 돌아온 것처럼 보여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재밌는 얘기라도 해봐.”

 “아? 아아, 음… 그렇군.”

 

 이치마츠의 뜬금없는 요구에 카라마츠는 차인 정강이를 손으로 쓸면서도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생각난 게 있는지 우쭐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기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내가 항공사에 들어가고 얼마 후에 있었던 일이다. 이 몸에겐 잭(Jack)이라는 친구가 있어서 말이다. 비행기에서 오랜만에 만났기에 '안녕, 잭(Hi, Jack)'하고 인사를 했지. 그랬더니 그 녀석 화들짝 놀라면서 총구를 내게 향하고 이렇게 외치더군. 'Help! Hijack!' ”

 

 

 

 


 항공납치라는 단어 Hijack을 이용한 말장난이었다. 아득해질 정도로 재미가 없어 이치마츠는 표정 관리를 잊을 정도로 얼이 빠졌다. 항공식 조크라는 걸까. 쓸데없이 알아듣기 힘들다.

 

 “그거, 재미없어.”

 

 그런가. 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머쓱하게 웃는 카라마츠를 바라보며 이치마츠는 문득 마음이 술렁이는 것을 느꼈다. 숨이 콱 막히고 심장이 쿵쿵 박차를 가하는 것은 불안과 닮은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잠깐 앉자”

 

 바다가 잘 보이는 벤치가 우연히 근처에 있던 것은 행운이었다. 풀썩 주저앉아 고개를 젖혀 바라본 하늘은 별의 모래가 촘촘히 박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내려앉은 밤 공기가 마음을 식히고 귓가를 간지는 파도소리가 괜히 더 상쾌하게 느껴졌다. 카라마츠도 마찬가지 기분이었던지 잔잔한 미소를 띠우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치마츠. 사랑한다.”

 

 

 

 


 가만히 손끝을 얽어오는 감각에 시선을 맞추니 카라마츠의 깊은 눈동자가 마음속을 읽어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뜻 비치는 빛깔은 짐승의 그것과 닮아있어 이치마츠는 마른 침을 삼켰다.

 

“나도. 사랑해.”

 

 간질간질한 기분이 열이 되어 타고 올랐다. 심장고동 소리가 손을 타고 들리지나 않을까 새삼 걱정스러워졌다. 살풋 눈꺼풀을 말아 올리며 호를 그리는 그의 눈웃음이 설마 그렇게 눈부실 줄이야. 그리고 역시 방심할 수 없다고, 이치마츠는 또 한 번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치마츠……”

“하지만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약속은 안 할 거야.”

 

 한 층 더 부드러워지는 표정에서 무언가 읽은 듯, 이치마츠는 돌연 그의 말허리를 끊으며 시선을 외면했다. 뒤이어 서운한 시선이 닿아오는 것을 알아채도 마주할 생각은 없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조심스런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밀려드는 파도가 조금 더 소리를 키우고 저 멀리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들 뿐이었다.

 

 

 

 

 

 

 


- 넌 평범하게 행복할 수 있을 텐데 내가 그 길의 걸림돌이 되는 게 싫었다고.

 

 

“아직… 고민하고 있는 건가?”

 


 카라마츠는 병원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물론 자신도 그런 것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
 그래, 세상의 편견 같은 것을.

 


 다만 그런 것 따위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이치마츠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카라마츠는 저 스스로를 최악의 남자라고 단언할 수 있다. 상냥하지도 다정하지도 않다. 상냥함을 연기하고 다정함을 연기하는 텅 비어버린 꼭두각시 인형. 그것이 저였다. 그렇기에 이치마츠를 선택하는 데에 이치마츠의 행복은 고려하지 않고 말았던 것이겠지. 형제들과 닮은 제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운 데에 이유가 없듯이 이치마츠를 좋아하는 것에도 또한 이유는 없었다.

 

 

네가 내 걸림돌이 될 리가 없는데…….
너는, 믿어주지 않는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수평선을 노려보는 이치마츠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카라마츠는 씁쓸한 기분을 금할 수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물밀 듯 밀려들어 쓴웃음이 흘렀다.

 

“그런가.”

 


-우린 행복해 질 수 없을 거야.

 

 

 

 


지금도 이치마츠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째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걸까. 이렇게 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는 이미 행복하다고 생각해 버리는데.

 


너는… 그렇지 않은 걸까.

 

 

 

 

 

 

 


 “지금은 그걸로 좋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사랑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차라리 새장에 가두어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도록. 이치마츠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연인이 아니라도 좋을 정도로. 아마 살아 있는 한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치마츠를 떠나보낼 생각도 없었다. 한 번 놓쳤고, 잊어보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 다시 놓아 주지 않겠어.

 

 

 

 


 가만히 시선을 내리까는 이치마츠의 머리칼을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손 안에서 파슬거리며 흩어지는 결 나쁜 머리카락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밤이 깊었군. 슬슬 돌아가지.”

 

 자글자글한 모래사장을 딛고 돌아가는 길은 누구도 말이 없었다.

 

 

 

 


*

 

 

 

 


 “어제 늦게 잠들었는데 괜찮아?”

 “아아, 물론이다.”

 

 

 전 날 어떤 일이 있든 날은 밝기 마련이다. 평소처럼 조식을 먹고 출근길을 함께 한다. 일상 속에 녹아들어 아무 일이 없었던 것 같은 아침을 보낸다. 똑같은 나날의 시작을 앞에 두고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배웅했다.

 

-어제는 제법 민폐를 끼쳐버렸던가.

 

 토토코양에게 고백받았다는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은 것만으로 충격을 받아 쓰러지다니 웃지도 못할 이야기다. 카라마츠는 빈혈이라고 알고 있는 모양이라 아침부터 온갖 진수성찬을 차려 줬지만, 만약 사정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이쿠, 죄송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미처 앞을 보는 게 늦었던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제법 성대하게 부딪혀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행히 상대는 마음 넓은 사람인 데다 꽤 서두르고 있었는지 허둥지둥 사과를 하고 달려가 큰 소란이 되지는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공항 내 카페에서 간단한 커피를 사 들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3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반쯤 올랐을 무렵이었다. 

 

 

 창문을 때리는 강한 폭풍과 함께 귀를 얼얼하게 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오싹, 소름이 돋으며 안 좋은 예감이 술렁였다.

 

 

“실례합니다. 내려갑니다. 죄송합니다.”

 

 에스컬레이터를 거슬러 달린 것은 거의 무의식중이었다. 머릿속이 온통 카라마츠로 점령되어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난밤 12시경, 테러로 말미암은 추격전이 벌어져….

 

 

 

 


 1층 구석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방송은 현재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전혀 보도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겠지. 이렇게 빨리 보도될 리가 없겠지. 점점 가까워지는 경찰차 사이렌이 어제 밤길을 걸으며 들었던 그것과 겹쳐져 숨이 막혔다. 어렴풋이 사건의 전말이 꼬리를 들어낸 것만 같았다.

 


「요즘 테러리스트가 극성이래.」
「어머, 그래요? 불손한 세상이네.」

 

 

 그것은 언젠가 들었던 바람의 소문이었다. 어째서 좀 더 경계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빨리 눈치채지 못했을까.

 


 불이 붙어 빙글빙글 추락하는 비행기는 비행장에서 멀지 않은 무인도를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 먼 거리에서 이치마츠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저곳에서 카라마츠가 죽음과 싸우고 있는데 무력한 자신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옆의 경찰 머리채라도 잡아 자신을 그에게 데려가 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가도 도움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저 당장 카라마츠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꺄아악-!

 

 웅성웅성 사람들이 몰려드는 가운데 허공을 찢는 비명이 들려온 건 바로 뒤쪽 이었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어제 카라마츠에게 고백했다던 토토코양이 주저앉아 있었다. 큰 충격에 눈을 감지도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벌어진 입으로 흐느낌과 닮은 낮은 비명을 흘리고 있었다. 왈칵 눈물을 쏟으며 귀를 막고 카라마츠의 이름은 잇달아 읊조리는 모습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주춤주춤 다가서려던 차에 그녀의 친구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와 그녀를 부축해 돌아갔다. 친구들 손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자꾸만 뒤돌아보며 그녀는 흐트러진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 그렇구나. 이 비극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구나.

 

 그녀는 사랑하는 남성에게 고백을 하고 그가 돌아오면 대답을 듣기로 하였다. 이렇게 알기 쉬운 사망 플래그가 또 있으랴. 이치마츠는 단순히 카라마츠의 형제 역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증거로 그는 아직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지 않았는가.

 

 

 

 

 조소하면서도 이치마츠는 현실감이 없었다. 사망 플래그라니 게임도 아니고 그런 게 현실에서 이루어질 리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카라마츠였다. 맷돌을 맞아도 죽지 않는 바퀴벌레 같은 녀석이 아닌가.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 포기해버리기엔 아직 너무 일렀다.

 

 

 분명 곧 있으면 머쓱한 표정으로 웃으며 불쑥 나타날 것이다.

 

 

 

 


 미안, 걱정했지? 라며 뻔뻔한 얼굴로 헤실헤실 웃으며 나타날 것이다.

 

 

 

 


 아아, 어쩌면 폼을 잡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 몸을 걱정해 주다니 Sweetie, 이것이야말로 Destiny가 아니겠는가!

 

 


 쿠소마츠. 카라마츠. 카라마츠 형.

 

 

 

 

 

 

 


  어서 돌아와 줘.

 

 

 

  보고 싶어.

 

 

 

 

 “이치마츠 형!”

 일도 팽개치고 서성거리던 도중 문득 누군가에게 손을 잡혔다. 익숙한 목소리로 돌아보니 어찌 된 영문인지 가족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카라마츠 형이 사고에 휘말렸다고 해서 다들 찾아온 거야.”

 


 무어라 묻기도 전에 토도마츠가 선두를 쳐 대답했다. 다들 서둘러 달려온 모양이라 오소마츠 형은 옷에 감자칩을 덕지덕지 묻히고 있었고 쵸로마츠 형은 바지를 뒤집어 입고 있었다.

 

 “점심 안 먹은 거 알아. 안절부절못하다가 형이 먼저 쓰러지면 안되잖아. 밥 먹으러 가자. 응?”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보다 훨씬 침착한 토도마츠를 의아스럽게 생각하며 따라갔다. 줄줄이 같은 얼굴이 모여들자 시선이 따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딱히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감각이 조금 신선하게 다가왔다. 텅 비어버린 양 회전하지 않는 머리는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을 끌어들이려 필사적이었다.

 

 

 

 

 

 

 

 

 

 

- 오늘 아침 8시경에 일어난 비행기 폭파사건은 ○○단체에서 테러를 일으킨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당시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분들은 현재 대부분 구조되었으나 아직 일부……

 

 

 “저거 거짓말이야.”

 


 식당 내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뉴스를 보다 후르릅 라면을 한 입 먹고 토도마츠가 말했다.

 

 “바닷바람이 거세서 구조가 더뎌지고 있대. 무사히 비행기에서 탈출한 승객이 꽤 되는데 아직 전원 구조하려면 한참이나 시간이 더 걸릴 예정인 모양이야. 무인도에 떨어진 본체 쪽은 아직 연료가 새고 있는 데다 근처 나무로 불이 옮겨붙어 폭발할 위험이 있어서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상태고…….”

 

 스마트폰을 두드리며 냉정하게 상황을 읊는 토도마츠를 보며 이치마츠는 그제야 어째서 그가 침착하게 있을 수 있는지 깨달았다.

 

 

 

 

 

 

 

- 톳티는 아직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어.

 

 

 어릴 적부터 카라마츠와 잘 붙어 다니던 그였다. 갑작스런 사고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뻔했다. 알기 쉬운 현실도피였다. 하지만 그것을 꼬집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믿을 수 있는 정보인 거냐며 쵸로마츠가 꼬투리를 잡아오자 은근한 자존심을 건드린 건지 토도마츠가 벌떡 일어나 스마트 폰을 뒤집어 보여주었다.

 


 “이 사이트는 믿을 수 있어! 이것 봐. 뉴스에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정보까지 나와 있다고! 경찰 측은 이미 테러범의 몽타주를 잡은 상태야.”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은 이치마츠가 패닉에 빠진 건 채 30초도 흐르지 않았을 때였다.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치마츠는 그 몽타주의 남성을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움푹 들어간 광대뼈. 두툼한 입술. 왜소한 체격에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그 남자는 아침에 이치마츠와 부딪히고 서둘러 달려 나간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카라마츠를…….

 

 눈앞이 비뚤어지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뒤집어지는 속을 게워내기 위해 한사코 화장실로 달렸다. 뒤에서 형제들의 목소리가 따라왔지만 뒤돌아 볼 여유는 없었다. 몇 번이나 올리고 타일 위에 주저앉았다. 가벼운 가분으로 마음 넓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 때의 자신에게 달려가 죽이고 싶었다. 시야를 먹어 들어오는 검은 구름을 떨쳐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치마츠 형, 이치마츠 형, 흔들어대는 손길은 쥬시마츠의 것이었을까. 얇게 뜬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 후우, 거친 숨소리를 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까무룩, 이치마츠는 정신을 잃었다.

 

 

 

 


*

 

 

 

 


 깨져버린 화면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교복 차림의 어린 '나'는 양 손으로 제 눈가를 비비며 훌쩍훌쩍 눈물을 쏟아냈다.

 


  '기회는 있었잖아.'

 


 언젠가 들었던 적이 있는 말이었다. 무슨 기회를 말하는 걸까. 언제 기회가 있었다는 걸까.

 


  '이미 늦어버렸어.'

 


 너는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거야?

 

 

*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시야에 들어온 건 쵸로마츠의 얼굴이었다. 괜찮냐며 열을 재는 손길에 가만히 기댄 채, 이치마츠는 눈동자만을 굴려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병원이야. 쓰러졌던 거 기억 안 나?”

 

 흐릿한 기억에 의지해 기억난다고 말하려 했지만 흘러나온 건 메말라 쉬어버린 쇳소리였다.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벼이 끄덕이고 일어선 쵸로마츠는 주섬주섬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오소마츠 형이 좀 난동을 부려서 다른 형제들은 그쪽에 있을 거야.”

 

 달칵, 물을 올리고 찻잎을 찾아 뒤적거리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 이치마츠는 입을 열었다.

 

 “쿠소마츠는?”

 

 말라버린 목이 따끔따끔했지만 목소리를 억지로 비집어 내니 침이 고여 조금 나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쵸로마츠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예상하던 질문이었다는 듯 쓰게 웃었다.

 


 “그 녀석 말야…. 나쁜 녀석이지…. 어차피 거절할 거면서 기대하게 만들고…. 대답도 안 돌려주고….”

 

 하지만 들려준 대답은 이치마츠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어 마치 말을 돌리는 듯한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쵸로마츠형?”

 “토토코양 아직 울고 있다고... ”

 

 일부러 이쪽을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알 수 없는 공기의 흐름에 술렁이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윽고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녀석... 아직 대답 안 돌려준 거야?”

 


 꾸며내는 듯이, 연기하는 듯이.
 바쁘게 움직이는 쵸로마츠에게 조심스레 건네 본 질문은 상상했던 것보다 그를 곤란하게 한 건지 그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다가 막 생각났다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 맞아. 그 녀석 너랑 가려고 식당 예약해 뒀더라.”

 

 

 

 


왜 그러는 거야.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야.
왜 그렇게 곤란해하는 거야.

 애타는 초조함에 이치마츠는 울컥 올라오는 화를 꾸욱 눌러 담았다.

 

 “토토코양 고백 거절할 거라는 거…… 그 녀석한테 들은 거야?”

 

 

 

 


 피이이-
 높은 소리로 울어대는 주전자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쵸로마츠는 말없이 불을 끄더니 근처 서랍을 뒤적여 반짝반짝 빛나는 비닐봉투 하나를 꺼냈다.

 

 “어제 말이야. 집에 전화가 왔어. 맡겨둔 물건 찾아가라고. 레스토랑에 미리 맡겨놨다가 일이 끝난 후에 너한테 건네 줄 예정이었던...”

 


 “그걸 왜 쵸로마츠 형이 받아서 갖다 주는 거야? 그 녀석이 건네줄 예정이었던 거지?”

 


 말허리를 끊으며 쏘아붙이는 이치마츠는 불안함에 먹혀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잇따른 동문서답은 쵸로마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 녀석 어딨어?”

 

 잔뜩 움켜쥔 이불을 놓을 줄 모르고 이치마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쵸로마츠는 그 모습을 괴로운 듯 인상을 찡그린 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이내 자박자박 걸어와 이치마츠의 침대에 걸터앉더니 이치마츠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사고가 난 직후에 말이야…. 통신이 왔대.”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 」

 


「사랑해서 미안했다.」

 


「이치마츠…」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는 속으로 기어들어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의미만큼은 똑똑히 닿아 왔다. 힘이 쭉 빠지며 세상이 기우는 기분이었다.

 


 “하하, 그게 뭐야.”

 


음조가 없는 목소리는 허무로 가득 차 기계음에 가까웠다.

 


 “뭐냐고…….”

 


 끄윽끄윽 넘어오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쵸로마츠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답하듯 이치마츠를 더욱 꼭 껴안으며, 쵸로마츠는 그의 오열을 가만히 받아주었다.

 

 

*

 

 

찌직-.

 

 

 

 


 파도가 힘차게 부딪히는 절벽은 재회한 날 카라마츠가 서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홀로 서서 이름을 중얼거리며.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쵸로마츠에게 받은 반짝거리는 비닐봉투의 봉합을 뜯으며 이치마츠는 멍하니 그런 것을 생각했다.

 

 카라마츠가 저에게 건네주고 싶어 했던 선물은 이제 그의 유품으로 거듭나고 말았지만 좀처럼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그동안 미루고 있던 것이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부드러운 천과 같은 것이었다. 혹여나 구겨지진 않을까 조심조심 꺼내고, 그것이 제 얼굴을 프린팅한 탱크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치마츠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쓸데없이 너무 잘 만들었잖아.”

 

 

 

 


분명 그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솔직한 감상을 들려주지는 못했겠지.

 

 

 

 


“너무 잘 만들어서 못 입겠다고…….”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이치마츠는 다시금 봉투 속을 뒤적여 보았다. 아무것도 없으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속에는 작은 쪽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꺼내 들어 휘갈겨진 그의 글씨를 보았을 때, 이치마츠는 창자가 끊어질 만큼 대 폭소 하고 말았다.

 

 

 

 

 

 

 

「 나 말고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게 해주지. 네가 날 포기할 수 없도록. 사랑한다제, 브라자! 」

 

 

 

 

 너무나 카라마츠다운 쪽지였다.
명쾌하고 쾌활하며 잔뜩 허세가 들어가 멍청하다 불러도 손색이 없을 내용이었다. 멍청함에 감탄해서인지 울컥 눈물마저 솟았다.

 

 

 

 


 “하지만 네가 먼저 떠나버렸구나.”

 

너무 웃어서인지 히끅히끅 넘어가는 딸꾹질을 추스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 번 뱉어낸 탓일까. 삐져나온 속마음은 자제심을 잃고 연거푸 터져 나왔다.

 

「거짓말쟁이」

 

「말만 번지르르한 녀석」

 

「언제나 그런 식이지.」

 

「그러니까 네가…….」

 

그러니까 네가 나 같은 거에 사랑받고 마는 거잖아.

 

 

 슬슬 울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잡을 때가 온 것 같다. 나이가 드니 영 눈물샘이 헐거워져 큰일이다. 20대 막바지에 다달아 여전히 이런 결심을 해야 하는 나를 10년 전의 나는 어떻게 생각할까.

 


*

 

 가정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만약 내가 팔 년 전에 집에서 섣불리 달아나지 않고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두 달 전 이곳에서 만났을 때 그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 들였다면.

 


-청소부 아줌머니들의 대화를 듣고 조금만 경계했더라면.


-그 날 마주친 그 남자를 조금만 더 붙잡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될 줄 몰랐잖아. 어떻게 예상하고 막는다는 거야.

 

 

 철썩철썩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맞춰 갈매기가 애처롭게 울어댔다. 길게 목청을 빼 우는 소리가 마치 어느 꿈에서 봤던 제 울음소리와 비슷했다.

 

 

 

 


「그래도 기회는 있었어.」

 

 

 

 


 멀리 아른거리는 수면 위로 하얀 그림자가 보였다. 햇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꼴이 퍽 그 녀석을 닮았다.

 

"카라마츠의 재담에 마음이 술렁였던 건 혹시 무의식으로부터 내게 주는 경고였던 게 아닐까……"

 

멍하니 중얼거리고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그럴 리가 없지. 그건 그런 술렁거림이 아니었다.

 

 

-단순히, 내가 다시 한 번 네게 빠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후회라는 건 관계없는 것까지 끌어들여 인과관계를 맺으려 해 정말인지 곤란하다. 어리석은 생각을 비웃듯 절벽 아래서 우르릉, 소용돌이가 일었다.

 

 

 쓸데없는 잡념을 털어버리고 다시 카라마츠를 떠올리면 야속하다고 말할 권리조차 없었지만 야속하였다.
누구를 원망하면 좋을까.
두 달이나 함께 지내며 입조차 벙긋하지 못했던 쓰레기 같은 저 자신인가. 위험의 소지가 충분했음에도 대비하지 않은 회사인가. 카라마츠를 앗아간 테러범은 수십 명을 길동무로 한참 전에 세상을 떴다.

 

 

 

 


관계없는 사고에 휘말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가족을 잃은 건 나뿐만이 아니다. 다섯 쌍둥이가 된 것을 슬퍼하는 것도 나뿐만이 아니다. 

 

 

 

 


「쿠소마츠」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 멍청한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어.

 

 

 

 


「멍청한 새끼」

 

 


새어나온 것은 비통한 울음이었다. 목이 콱 막히고 눈이 뜨거워 시야가 아찔했다. 숨을 삼켜도 터져 나오는 눈물을 넘길 수 없었다. 내가 가장 슬프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비극 속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까. 그럴 자격은 내게 없다.

 

 

 

 


콧물이 숨길을 막아 기침이 연거푸 터졌다.
입을 막은 손을 뗐을 때, 영화처럼 피가 흥건하면 좋을 텐데. 그리고 떨어지는 잎새처럼 빙글빙글 추락해 너를 따라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럴 자격도 내게는 없겠지.

 

 

 

 


실컷 마음고생만 시켜놓고 떠나보내고야 말았다.
내가 이기적이어서. 내게 용기가 없어서.

 


 네가 내게 고백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 속에 들어있던 네 고뇌를, 용기를, 사랑을.
좀 더 일찍 눈치챘으면 좋았을 텐데.

 

 왜 달아나고 말았을까.

 

 

 

 


 편견에 휘말려 내 멋대로 네 행복을 바란답시고 달아나버렸다. 네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었을 텐데.... 좀 더 일찍 마주 봤으면 좋았을걸.

 

 

 

 

 

 

 

 

 

 


-문득 바라본 바다는 너와 같아서, 푸르게 일렁일렁 눈이 부셨다.

 

   자살은 죄악이라던가.

 

 멍하니 내려다본 바다는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한 번에 꿀꺽 삼켜지면 물은 피어나는 빨강에 삽시간에 색을 잃고, 하얗게 반짝이는 파도의 파편은 부서지며 뒤집혀 방향을 잃겠지. 선명한 죽음의 색채를 머릿속에 그리면서도 어째선지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저 멀게만 느껴졌다. 다리가 물 먹은 것처럼 무겁고 어깨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 그리고 인어공주는 끝내 물거품이.....

 

 

 십 수년간 너를 짝사랑하고, 흘러넘치기 전에 고백을 받고, 보답 받은 기분으로 등을 돌렸다.

 

 호의를 받을 줄만 알았지 한 번도 돌려주지 못했어.

 어차피 만날 수 없다면 차라리 나를 데려가 줘.

 네가 내게 준 모든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들려줄 수만 있으면 족하니까.

 

 

 

 

 
「 고맙다고, 」

 

 

 

 


「 미안하다고, 」

 

 

 

 


「 행복했다고. 」

 

 

 

 


「 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 」

 

 

 

 

 

쿠소마츠.

 

 

 

 

 

 

 


바보마츠.

 

 

 

 

 

 

 


카라마츠.

 

 

 

 

 

 

 

 

 

 


너를 정말 많이.....

 

 

 

 

 

 

 마지막으로 올려본 하늘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워서, 선선한 바닷바람에 안겨 꿈을 꾸기에는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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