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모든 것은 한 장의 보고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정비소에 도착한 이치마츠의 눈앞에는 보자마자 구겨버리고 싶은 망할 서류가 있었다. 비행을 막 끝내고 도착한 뜨끈뜨끈한 비행기와 더불어 번듯하게 쓰인 최악의 글씨체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급기야 이치마츠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입을 헤쭉 벌리며 턱에 힘을 주고는 큭큭거리기 시작했다. 이치마츠의 굽은 등 너머로 진한 보라색의 음울한 오오라가 번져갔다.
주위 동료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피신하거나 시선을 돌린 지 오래였다. 이치마츠가 턱에 힘을 잔뜩 준 채 호두를 만들어 앞으로 내미는 동안에는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상황에도 말이 없고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무뚝뚝한 이치마츠가 유일하게 안면근육과 성대를 사용하며 반응하는 것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이치마츠는 턱을 앙다물고 네 쌍의 어금니를 맞대고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국제선씩이나 쳐 몰고 다니는 주제에 뭔 말이 이렇게 많아.“
당연히 말이 많아야 했다. 이치마츠가 들고 있는 서류는 다른 게 아닌 비행 후에 파일럿이 정비사에게 보내는 비행 보고서였다. 현장의 모두가 일명 소원수리서라고 말하는 그것이었다.
비행 전에도 안전에 아무 이상이 없게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비사의 맡은 바 할 일이자 책임이다. 완벽한 정비를 위해 시운전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운전일 뿐, 현장에서 그 비행기를 운행하는 것은 오롯이 파일럿의 몫이다. 그렇기에 정비사에게는 항공기를 운전하는 파일럿이 직접 겪은 비행기의 상태에 대한 코멘트가 담긴 서류는 행동 지침에 가까울 정도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도가 높을수록 책임감은 올라가고 책임감이 올라갈수록 사람의 마음은 부담스러움에 휩싸인채로 고통 받다가 결국에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고 싶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이치마츠는 파일럿의 어떠한 코멘트에도 불구하고 맡은 바 책임을 묵언수행으로 묵묵히 해내어 모두의 귀감이 되어 일찍이 바른 신입 정비사 상도 수여받은 적이 있을 정도의 인재였다. 하지만 그런 인재(人才)에게 누구도 예상조차하지 못한 취약한 부분이 존재한 나머지 그것이 자극받자마자 다른 형태의 인재(人災)로 돌변하게 될 거라고는, 그를 채용한 회사의 사장과 면접관들조차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일이었다.
"진짜, 짜증나 죽겠다고! 이딴 말투!“
마침내 분노를 참지 못한 이치마츠의 손아귀 힘이 서류의 귀퉁이를 힘껏 구겼다. 그래봤자 안의 내용은 모두 한 점의 구김살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이치마츠는 신경질적으로 손에 든 보고서를 제 케비닛에 쑤셔 넣고는 안전모를 집어 들며 정비실을 나가버렸다.
이치마츠의 케비닛에 내던져진 서류에는 누가 끝을 위로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오른쪽으로 끝이 휘어지듯 올라간 글씨체가 반듯하게 써 있었다. 보고서의 하단에는 한눈에 보아도 멋 부리느라 힘이 잔뜩 들어간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행 시 딱히 문제될 만한 사항은 없었다. 다만 긴 트래블(Travel)로 인해 생긴 그대와 나 사이의 트러블(Trouble)만이 존재할 뿐.
추신. 한가지 문제가 될 만한 게 있다면, 착륙시 왼쪽 날개의 안쪽 하단에 붙어있는 타이어가 거의 닳은 것 같은 게 느껴지는 정도? 러버(Rubber)가 조금 부족한 것 같다.
당신의 러버(lover), 카라마츠 마츠노.‘
격납고에서도 이치마츠의 짙은 보라색 오오라는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신입으로 들어온 어린 정비사는 심지어 비행기 날개 하단에 몰려들어있는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 먹구름을 보았다고 말 할 정도였다. 결국 동료들 중 누구도 이치마츠의 곁으로 다가가 선뜻 작업을 같이 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딱히 이치마츠가 이 정도 일을 혼자서 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타이어를 교체하고 정상 작동이 되는지 까지는 누군가가 같이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이치마츠의 기백에 용기를 잃은 동료들은 주위에 있는 다른 비행기를 점검하거나 기자재를 옮기며 도와줄 타이밍을 재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타이어를 수레에 싣는 동안 이치마츠는 그렇지 않아도 게슴츠레한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음울한 목소리로 저주라도 거는 듯이 저음으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가 불경을 외우는 줄 알고 홀린 듯 다가간 신입을 옆에 서있던 이치마츠와 입사동기인 동료 하나가 급하게 잡아챘다. 신입은 지금 다가갔다간 입사와 동시에 퇴사를 고려해야 할 것이라는 협박 같은 회유에야 겨우 걸음을 멈췄다.
작업은 바른 신입 정비사 상 수상자답게 재빠르고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내 안과 다른 타이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수상자의 여유와 재치를 바라보며 하필이면 성실한 인재에게 닥친 재앙을 맘 속 깊이 안타까워했다. 이치마츠가 근무 중에 이토록 정서불안을 보이게 된 것은 모두 코멘트를 적은 마츠노 카라마츠 때문이었다.
이치마츠는 그동안 파일럿들이 남긴 코멘트에 한 번도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반응한 적이 없었다. 보고서를 받고는 늘 조용히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뭔가를 찾고는 바로 작업에 착수할 뿐이었다. 정확하게는, 그 누구도 이치마츠에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코멘트를 남기지 않았다.
보통의 소원수리에 담긴 코멘트는 대부분이 단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한 달 전 있었던 인사이동 이후로 평온하던 이치마츠의 보고서에 대격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회사 인원 여럿이 갈려나갔다는 풍문의 주인공, 마츠노 카라마츠 때문이었다. 그가 온 이후로 이치마츠에게 오는 보고서는 죄다 오른쪽으로 멋스럽게 고개를 쳐들은 채로 그에게 폐부가 저려오는 코멘트들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이치마츠가 더 환장할 노릇인 것은, 다른 동료들에게는 이 빌어먹을 카라마츠가 전혀 이따위 말투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왜, 대체 왜! 왜 항상 나한테만 이따위로 구는 건데, 미친 카라마츠!“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다른 정비사에게 정상적으로 쓴 비행 보고서를 본 그 날 이후로 완전히 실성한 상태로 작업에 임하곤 했다. 물론 그의 표정이 어떤지, 소문의 주인공인 카라마츠는 전혀 알지 못 한 채 이직한 회사와 새로운 공항의 분위기에 몸을 맡긴 채 그저 인생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정작 그가 이치마츠를 만난 건 입사 이후 딱 한 번, 전체 직원들과 마주한 하반기 신입사원 입사식 때가 전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치마츠는 그저 그와 유난히 자주 눈이 마주친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마 이치마츠는 그 때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카라마츠의 눈빛에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기이한 느낌은 필시 미래의 자신이 보낸 신호였을 거라고, 후일의 어느 날 이치마츠는 그렇게 회상했다.
"대체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말씀이냐니, 이걸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이치마츠의 말끝이 앙칼지게 올라갔다. 벼르고 벼르다 마침내 이치마츠는 비행이 끝나고 서류를 작성한 뒤 승무원에게 보고서를 넘기는 현장을 급습했다. 마침 카라마츠는 승무원에게 막 서류를 넘기고 오늘도 멋지군요, 역시 최고의 승무원은 다릅니다, 라며 검지와 중지를 붙여 눈썹에 대었다 떼며 경례를 보내는 중이었다. 날카롭게 올라간 말끝과 더불어 이치마츠가 품에 안고 있던 서류뭉치를 허공으로 흩뿌렸다. 공중으로 솟구친 미색의 종이들이 나풀나풀 갈지자를 그리며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서류의 끝에는 하나같이 길은 카라마츠의 코멘트와 하나같이 간결한 이치마츠의 단문이 적혀있었다. 분노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열로 귀 끝까지 빨개진 얼굴로 식식거리는 이치마츠와 놀란 눈으로 다급히 서류를 쫓는 카라마츠 사이로 종이에 담긴 코멘트들이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조종실에 있는 무언가가 느슨하게 풀려있다, 나를 향한 그대의 마음이 풀어진 게 아닌가 걱정되는 오늘. 블랙커피의 쓴맛을 그대도 좋아할련지?'
'그 무언가를 단단하게 고정시켰음. 블랙 안 좋아함.'
'조종실 앞 유리창에 나를 보고 기절한 파리가 붙어있었다! 부디 그대는 날 보고도 기절하지 않도록.'
'살아있는 파리를 주문하였음. 부디 그 쪽이 기절하시길.'
'앞 유리에 흠집이 생긴 걸로 추측된다. 그대의 마음에 누군가 흠을 내고 달아난 건 아닌가, 이 추측이 착각이길 바라며.'
'추측이고 착각임.'
'비행을 마치고 내리려는데 조종실에서 쥐가 발견되었다!!'
'고양이를 투입.'
'핸들에 달아준 고양이 인형이 무척 마음에 든다. 그대의 상냥한 마음씨에 경배. 그러나 자동비행장치를 사용할 때는 핸들을 쓸 일이 적어 유감이다.'
'이 기체에는 자동비행장치가 없음. 자동장치는 A사 330. 운전 똑바로 하시길.'
"뭐냐구요, 대체!!“
적막으로 가득한 보딩 브릿지 안에 이치마츠의 날카로운 고음이 울려 퍼졌다. 승무원은 이상기류를 감지했는지 어느새 브릿지 옆 비상계단을 통해 주기장으로 빠져나가서는 이동차량을 타고 사라져버렸다. 승객과 승무원이 다 빠져나가 텅 빈 보딩 브릿지 안에는 달궈진 얼굴의 이치마츠와 어리둥절한 얼굴의 카라마츠 뿐이었다. 카라마츠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류를 주워드는 동안 이치마츠의 팩트를 가장한 언어폭격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저랑 밖에서 따로 만난 적도 없잖아요! 말끝마다 그대라니, 차라리 직접 나한테 와서 하는 말이면 몰라도 이건 아니잖아!! 다른 정비사한테는 한 번도 안 그러면서 왜 나한테만!!"
이치마츠는 머리를 감싸던 두 손으로 있는 힘껏 허공을 내리쳤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이 원맨 쑈를 눈 동그랗게 뜬 채로 혼자 보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뭔가를 다시 외치려다가 순간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순간 카라마츠도 이치마츠도 움찔 하며 어깨를 떨었다. 동공이 막 흔들리는 찰나였다. 턱 끝까지 지퍼를 올린 이치마츠의 작업복 사이로 아주 조금 드러난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열은 그대로 쭉 올라가 마침내 이치마츠의 이마까지 도달하고는 귓바퀴마저 점령했다. 그 때였다. 이치마츠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숨을 잔뜩 들이마셨다. 잠시 그대로 멈춰있던 이치마츠는 숨을 내쉬면서 가성에 가까운 목소리로 재빠르게 중얼거렸다.
"무슨…….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이치마츠의 말이 끝나는 순간, 계류장의 넓이만큼 거대한 정적이 그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카라마츠의 목젖이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카라마츠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그러자 이치마츠는 갑자기 고쳐진 엔진처럼 고개를 퍼뜩 들고는 코가 막힌 듯한 숨소리를 내쉬었다. 그러고는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으며 내팽개쳐진 서류 뭉텅이를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치마츠가 브릿지를 탈출하는 순간, 착륙 시 엔진의 소음에 가까운 비명이 빈 브릿지를 타고 들려왔다. 카라마츠가 황급히 뒤를 쫓아 나갔을 때, 이미 이치마츠의 모습은 격납고 안쪽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 뒤로 한동안 이치마츠는 그가 아닌 다른 파일럿의 비행기를 수리했다. 보딩 브릿지 안에서 그렇게 미친 소리를 해댄 뒤로 꼬박 한 달이 흘렀다. 그 일이 터지기까지 두 달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는 걸 생각하면, 뭔가 억울한 감이 없지 않은 이치마츠였다. 입사동기인 동료의 말에 의하면 그 뒤로 카라마츠의 그런 문서 테러는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다만 가끔가다가 들리는 목격담에 의하면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핸들에 걸어놓았던 작은 고양이 인형을 들고 다니는 때가 많아졌다고 했다. 이치마츠는 들으면서 괜히 안전모를 푹 눌러썼다. 뭔가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결국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카라마츠가 그를 찾아온다거나 이치마츠가 그를 찾아간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치마츠가 서류를 들고 그에게 퍼부었던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것이었다.
괜히 어딘가 쓸쓸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이치마츠는 앞에 놓인 커피 잔을 입에 가져 갔다.휴일이면 항상 같은 카페에 와서 커피를 시키는 게 일상이 된 이치마츠였다. 달콤한 바닐라 라떼의 따스한 기운이 입술을 타고 온 몸으로 번져갔다. 역시 블랙은 싫었다. 블랙을 떠올리자 다시 카라마츠가 생각났고 갈비뼈를 움켜쥐게 만드는 기괴한 말들과 그대라는 뻔뻔한 호칭까지 생각났다. 이치마츠는 고개를 흔들며 재차 바닐라 라떼를 두 모금 삼켰다. 벌써 스산해진 날씨 덕에 따뜻한 라떼가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오기로 한 사람이 약속 시간을 이십분이나 넘긴 상황인데도 여유가 생길 정도였다.
이치마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치마츠가 앉아 있는 곳은 유명한 호텔의 프런트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혼자서도 종종 들르는 곳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곳 카페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 특별함과 이 카페의 바닐라 라떼 맛이 이치마츠의 발길을 계속 끌어당기곤 했다. 주위에는 이치마츠처럼 혼자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과 상대방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람들, 긴 테이블에 앉아 여럿이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등 여러 군상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치마츠는 이대로 시간이 흘러도 제 모습은 혼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기로 한 사람은 시간을 넘긴 순간부터 올지도 모를 사람이 된 지 오래였다. 애초에 이치마츠는 누군가가 자신과 만나기로 약속을 한 것인지조차 혼동될 정도였다. 평소처럼 늘 휴일에 오는 카페인 탓에 약속이 있을거란 착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럼 나는, 누굴 기다리는 걸까. 생각을 하며 한참 주변을 둘러 보던 이치마츠가 막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멀리서 누군가가 두리번거리면서 카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이치마츠는 귀를 쫑긋 세우며 그가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이기를 바라며 소파의 팔걸이를 잡았다. 엉덩이를 반쯤 들어올리자 누군가의 얼굴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 누군가도 이치마츠를 발견했는지 막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곳에서 마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똑같이 숨 막힌 소리를 내며 서소를 알아보았다.
"…어?!"
"그쪽도…여기에서 약속이 있다고요?"
"네. 그…그런데 이치마츠씨도 여기서…만나기로 하신건가요?"
"네. 아직 안 왔어요."
저돈데, 라며 카라마츠는 멋쩍게 말하고는 고개를 다른 곳을 돌렸다. 검은 가죽자켓에 안에서도 쓰고있는 선글라스, 핏이 딱 맞는 바지와 윤기가 나게 잘 닦인 구두까지. 멋이라는게 흘러 넘치다 못해 폭발한 꼴이었다. 이치마츠는 그가 주문을 마치고 올 때까지 아직 온기가 남은 라떼를 마시며 그를 훑어보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이치마츠는 자꾸만 그에게 따라붙는 시선을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주문을 마친 그가 자연스럽게 이치마츠의 맞은편에 앉았을 때는 무심코 입 안의 커피를 뿜어버릴 만큼 놀라버렸다.
"뭐,뭐,뭐, 뭐에요!?"
"저도 아직 기다리는 사람 안 와서 잠깐…같이 좀 앉아 있을까 합니다만."
"다른 곳에 앉으세요! 그러다가 만나기로 한 사람 오면 어떡하려고요!"
"알겠…어요.“
카라마츠는 시무룩하게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라마츠가 움직이자 그가 손에 들은 잔 사이로 진한 커피향기가 느껴졌다. 시럽도 설탕도 넣지 않은, 블랙 그 자체인 커피였다. 이치마츠는 묘한 얼굴로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두리번거리던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반대편에서 한 칸 뒤로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에서 흐르는 잔잔한 음악 사이로 카라마츠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잔을 다 비울 때 까지 이치마츠의 맞은편에도, 카라마츠의 맞은편에도 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빈 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이치마츠도 그 순간 비어서 싸늘하게 식은 잔을 내려놓았다. 뒤를 돌아보자 마침 자신을 바라보던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쳤다.
"안오네요."
"그러게요.“
멜로디 하나가 지나갈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에서 나가는 동안 이치마츠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온 카라마츠를 의식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표정은 보통 때의, 살짝 무뚝뚝하고 어딘가 모르게 불퉁한 평소의 이치마츠의 모습이었다.
"만나기로 한 사람, 누구에요?"
"알 거 없잖아요."
"전 소개팅인데."
그 말에 이치마츠는 잠시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올려다보았다. 평소 목을 쭉 빼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걷는 습관과 비행기 아래서 몸을 숙이는 일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구부정한 자세가 몸에 밴 탓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이치마츠는 이렇게 키가 컸었나, 라는 생각을 하며 카라마츠를 올려다 보며 반문했다. 이치마츠의 반응에 살짝 눈을 내리깔며 바라보는 카라마츠의 모습이 갑자기 너무나도 낯설었다.
"여자분 이었어요. 두 번째 만남이 될 뻔 했는데, 여기까지인거 같습니다."
"무슨…그런 게 어딨어요."
"여기 있네요."
"그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것도 상대방이 정했어요?"
"네."
그러자 이치마츠는 인상을 팍 구겼다. 마치 카라마츠의 비행 보고서를 받아들었을 때의 표정과 똑같았다. 이치마츠는 냉소를 날리며 카라마츠에게 그들이 방금 막 나온 카페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이치마츠가 자주 가는 그 카페의 특별한 점은, 이치마츠가 내내 숨겨왔던 무언가와 맞닿아 있었다. 그걸 말 하는 순간 이치마츠는 스스로 금기를 깨버리는 자괴감과 더불어 아래로 추락하는 기막히게 짜릿한 자기파멸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어, 이대로 멋쟁이 파일럿 카라마츠 씨가 날 경멸하면서 내가 손 댄 모든 것에 닿기를 거부하겠지.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나한테 수리 맡길 일도 없지만, 앞으로는 영영 볼 일도 없을 테니까. 이치마츠가 자조하며 말을 마친 뒤였다. 카라마츠는 보딩 브릿지에서의 그 날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이치마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이거야. 사소한 호감의 결말. 조금 비참하기는 하지만, 먼저 멋대로 꿈을 꾸게 한 게 누군데. 이치마츠가 막 말을 꺼내려던 그 때였다.
"게이였어요?"
"….네.“
갑자기 카라마츠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앞으로 내딛던 걸음이 멈춰 섰고 몸은 그대로 반 바퀴를 돌아 카라마츠와 마주보는 꼴이 되었다. 카라마츠의 얼굴은 한 달 전의 그 모습과는 어딘가 모르게 달랐다. 카라마츠는 뭔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린 채로 잠시 허둥거리다가 겨우 다시 되물었다.
"진짜요?!“
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라마츠의 반응이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경멸할 거라면 빨리 해줬으면 하는 조급한 마음이 짜증을 일으켰다. 그와 반대로 마음 속 어딘가의 한 구석에서는 실낱같은 무지개가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라는 희망의 새싹을 짓밟으며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쳐내려던 순간이었다.
"나도, 나도 그렇습니다만."
"뭐…가요?"
"이치마츠 씨처럼, 나도….“
카라마츠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숙인 고개 너머로 새빨개진 귓바퀴와 달아오른 뒷목이 보였다. 이치마츠는 잠시 카라마츠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 카라마츠가 소개팅에 대한 말을 했던 게 다시 생각났다. 카라마츠는 상대방이 소개팅으로 만나기로 한 '여자분 이었'다고 말했다. 보통 남자라면 그런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걸, 이치마츠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치마츠는 보도블록이 트램벌린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치마츠 씨.“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저음 목소리에 몸이 얼어붙어버렸다. 한낮의 길거리였고 고급 호텔의 근처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그 곳에서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손이 잡힌 채 서있었다. 카라마츠의 목젖이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처음 봤을 때 부터 계속,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나…이치마츠 씨는, 아닐까봐."
"그래서, 그런…갈비뼈 나갈 말들을 했어요…?"
"그, 그건…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이 자꾸 그렇게 말이…“
싸늘한 거리에 햇살이 돌기 시작했다. 푹 숙인 고개와 달리 마주잡은 손은 그네처럼 그들 사이의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그네를 타고 서로의 떨림이 진동이 되어 몸에 가슴에 닿았다. 길어지는 침묵을 깨고 카라마츠가 불쑥 자켓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조종실에 쥐가 나온다는 말에 이치마츠가 달아주었던 작은 고양이 인형이었다.
"…이거.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떼놓고 다닌 적 없어요."
"그런데, 왜…한 번도 안 찾아왔어요? 게다가 다른사람, 만나려고 했고."
카라마츠의 얼굴에 아픈 기색이 스쳐갔다. 잠시 말이 없던 카라마츠가 내밀었던 고양이 인형을 고쳐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이치마츠를 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사실 소개팅은 없어요. 거짓말입니다. 이치마츠 씨가 자주 가는 곳에 가서 같이 만나 말하려는 생각에만 가득차서…“
그러자 이치마츠는 유난히 해외 항공기 운항을 자주 잡던 카라마츠의 일정이 떠올랐다. 비행기마다 잡혀있는 일정 중 가장 멀리 가는 항공편의 파일럿에 그가 있었던 걸 자주 보았다. 처음에는 그 날 이후로 자신이 완전히 싫어진 거라고 생각했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와 휴가를 맞추기 위해 일정을 바꾸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이치마츠는 다시 한 번 보도블록이 트램벌린이 되는 기적을 맛보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이치마츠는 이전부터 계속 그를 마주할 때 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을 것이다. 그 두근거림은 카라마츠가 코멘트에 '그대'라는 말이 두 번째로 등장한 때부터 시작하여 핸들에 걸을 고양이 인형을 사러갈 즈음에는 걷잡을 수 없는 변화의 고동소리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이치마츠만이 모르는 척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눈앞이 심장 고동소리로 핑핑 돌았다. 이치마츠가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감싸려하자 카라마츠의 손이 그를 잡았다. 잔뜩 떨리는 눈으로 고갤 들자 카라마츠의 얼굴이 보였다. 이치마츠는 그의 눈 속에서 자신과 같은 떨림을 보았다.
"저, 이치마츠 씨, 만나는 분, 없으시다면 저와….저랑 같이…“
카라마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이치마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근거리다 못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사랑에 이토록 서투른 파일럿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이치마츠는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열이 오르는 것만 같은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카라마츠가 들고 있던 인형을 낚아챘다. 작은 고양이 인형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치마츠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얼마든지."
이치마츠의 손 안에서 고양이 인형이 그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마치 고양이의 입을 빌린 것 같은 몸짓이었다. 카라마츠는 아주 짧은 순간 멍한 얼굴로 이치마츠를 바라보았다. 고양이 인형 너머로 질끈 감은 눈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카라마츠는 곧바로 그를 껴안았다. 온 몸이 그의 품에 안긴 채 이치마츠는 작게 훌쩍였다. 타이밍을 놓친 탓에 카라마츠에게 말 할 수 없게 된 뭔가가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알려준 그 비밀은 오늘 이치마츠도 만나기로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 주석
중간에 나오는 카라마츠와 이치마츠의 개드립 대사는 원문이 존재하며 패러디로 사용했습니다.
원문은 이곳에 :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humordata&no=96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