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물뿌리개
글쓴이 : 밀스
AU : 카메음(카메라x음향)
공미포 약 12,000자예요~!! 감사합니다!^ㅁ^
요새 좀 바쁘긴 했다. 걔나 나나 사회인이고, 박봉임에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일만 많은 부당한 노동의 장에서 주 7일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특히 나처럼 외주 받아 헐값에 부림당하는 숨 쉬는 음향기기는 삶이 기구하여 비주기적으로 문득 자살을 결심한다고. 가장 최근에 뛰어든 판은 심지어 영화였다. 정수리로 스탭 골수까지 뽑아먹는 장기 살생 프로젝트.
안 되겠네. 정정한다. 요새 존나 많이 바쁘긴 했다. 주로 고정 수입 없는 내가 그랬고, 지역 방송국서 장수 프로그램 카메라만 몇 년 째 돌리고 있는 카라마츠는 내 일상에 꾸준한 부재중 전화와 읽지 않은 문자 메시지의 형태로 존재했다. 그래서 걔와 나의 연락은 뜸했고 만남은 더 뜸했으며 섹스는… 아니 이거 거의 생불 수준 아니야.
그러므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럴 만도 하다 동감해주며 어깨를 두드려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자애롭게 속삭여주는 것이다. 그래 네가 인간이지 부처니. 이것은 다 나의 죄다. 미타찰에서 기다리마. 먼저 간다. 종국엔 투신.
인정한다. 죽일 놈은 나다. 삶이 나를 샌드백마냥 때릴 때마다 고려하는 자살, 어서 실천해야 마땅하다.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대략 난감한 상황에 나도 모르는 새 처해 있던 것이다. 카라마츠가 나를, 내가 자원 봉사자니, 차갑게 비난한대도 나는 변명 한 마디 못 해보고 닥쳐야 함이 분명했다. 카라마츠와 나는 연인이라는 이름하에 쌍방향 사랑 폭격이 원활한 연애를 조건으로 하는 관계였지, 상대에게 애정 퍼다주는 호구 짓만 하자 약속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지금 그 구차한 변명 한 마디 못 하는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속상하여 드라마 여주처럼 전선주 뒤에 숨어 카라마츠를 바라보기만 하는 찌질한 행위 실천 중이다. 정확히는 걔가 ‘내가 모르는’ 여자와 팔짱을 끼고 들어간 가게 간판을 노려보는. 네 글자가 난해하다. 사파이어. 그러나 뭐하는 가게인지는 너무도 명백했다. 나는 통유리 너머 번쩍이는 귀금속들과 간판에 적힌 보석 이름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니까 이건 설마. 아니 아마도 확실히 아마.
여자가 손가락으로 유리 케이스를 가리키자 다른 반지 보고 있던 카라마츠가 충견처럼 곧바로 시선을 틀었다. 웃는데, 그 웃음 심히 호구 같다. 내가 자주 보던 것이다. 얼굴 근육이 녹아내린 사람처럼 웃는 카라마츠.
주머니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아마 걔 이름밖에 없을 최근 기록 목록을 확인했다. 다 부재중 아니면 메시지. 나는 몇 달 치 카라마츠 이름과 걔가 나에게 닿기를 시도한 모든 시간들을 읽어 내려갔다. 다섯 달 전에는 하루에 열통씩 보내던 문자들이 최근에는 세통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사라진 일곱통의 어디야 일하는 중? 잘 잤어? 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거 사랑이 삼분의 일 크기만큼 축소되었다고 봐도 되니. 봐야 하니.
그러나 카라마츠가 하루에 세통의 메시지로 내게서 마음이 떠났노라 보고할 때 나는 뭘 했는가. 문자 발신함을 확인했다. 그 다음엔 전화 발신 기록. 다음엔 카라마츠와의 라인.
나는 지난 나의 무심함과, 잠적한 범죄자의 그것과도 같은 희소한 문자 라인 전화들의 정당화를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것도 사무실이라고 나름의 구색은 갖춘 후진 오피스텔에서 동료 몇과 엎어져 있다 나온 참이었다. 도쿄행 열차 안에서부터 대가리로 진자 운동을 했으므로 오피스텔 도착하자마자 널브러졌다. 소파 구석에 짱박혀 옆구리 접고 누워 허공 향해 삿대질했다. 씨발 담에 또 액션 받아오는 새끼 있음 조져버린다. 야 씨발 나도. 반대편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A가 느닷없이 흥분하여 내 쪽으로 뻗은 다리 휘둘렀다. 내 턱 아래를 강타했다. 쌍욕이 치밀었고 그러나 이 악 물고 참았다. 넓은 아량 보인다 내가. 이번에 제일 혹사당한 놈이라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액션이고 뭐고 S가 찍는 영화 받아오는 새끼는 머리 가슴 배 삼등분한다 진짜.
‘걔 존나 싸가지 없더라. 이미지 메이킹 오져.'
‘배우는 생긴 것만 보고는 모르는 거라니까? 씨발 미지근하다고 커피 바닥에 붓는 새끼를 국민 남동생이다 뭐다. 나이도 어린 새끼가 아오.'
‘니 동생 걔 빠순이라매.'
‘그 씹새끼 포스터가 걔 방 벽지다 벽지. 말 해 줘도 안 믿을걸, 오빠가 잘못했으니까 그랬겠지 하면서.‘
애새끼 키워봤자 다 소용 없어. 뻔뻔하게도 부모님 노고를 지한테 돌린다. A가 속이 탄다며 물을 찾았다. 나는 일말의 온정을 내심에서 발굴하여 아이스크림을 사오겠다며 일어섰다. 벌떼같이 달려드는 각종 빙과류 이름을 모두 무시한 채 현관문을 열고, 엘베 잡아타고, 내리고, 슈퍼 향해 걷다가……
“아니 씨발 근데 왜 이 근처에 금은방이 있고 지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가게와는 영 매치가 안 되는 동네가 여기였다. 이런 후진 곳에서 그런 고급진 물건 판매하다니. 금방 망하리라 확신한다. 망할 것이 분명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돌멩이란 돌멩이는 다 걷어차며 귀가했다. 오피스텔 문을 열었다. 목소리가 와르륵 쏟아진다.
“모리나가 초코 사왔냐?”
“내 거 아이스박스으.”
“아이스박스 내가 사달라고 한 거거든. 너 유자 소르베 시켰잖아.”
“유자를 누가 먹냐. 그거 너 먹으라고 말 한 건데.”
“닥쳐 새끼들아 니네가 사다 먹든가.”
내가 딱 하나 있는 방으로 들어가 덜컥 문을 잠그자 자식들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문 너머로 웅성대는 소리가 깔끔하지 못하게 들려온다. 야 이 새끼 아이스크림 안 사왔어. 아 뭐야 사온다매. 갑자기 왜 저러는데, 쟤 생리하냐?
내용마저 거지같은 저음질이 나를 힘겹게 만들었다. 문 열어 보라며 성화다. 나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헤드셋 꺼내 착용하고 멈춰있던 엠피쓰리를 재생시켰다.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역시 음악의 아버지 바흐 형님. G선상의 아리아가 내 심신을 안정케 한다. 나는 클래식 들으며 의식 아래로 잠겨갔다. 기분 같아선 아무 생각 없이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 싶었으나 과거를 더듬고 미래를 궁리하는 것이 수면보다 시급했다. 실상 잠조차 현실에서의 도피책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데, 즐기질 못하겠음 부딪혀라도 봐야하지 않겠는가. 눈을 부릅떴다. 나는 존재하는 고로 생각한다. 가장 심각하게 카라마츠를.
고등학교 3학년, 나는 진로 희망서 공란 채우는 것을 미루고 미룬 끝에 결국 음향과 영상 관련 쪽에 종사하여 먹고 살기로 결정했다. 음악이 좋았다. 소리를 다루고 싶었고, 최소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내 자기 비하가 도자기 타래마냥 켜켜이 쌓인 인생을 좀… 자살 안 하고 생기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필사적인 기대가 존재했다. 물론 다시 돌아간다면 선택 안 했을 직종이었다만 아무튼 그땐 그랬다. 내가 나는 이런 일을 하리라 말하며 진로 희망서 들이밀었을 때 어머니가 그러셨다. 네 성격에 그런 일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그 때는 내가 왜 못 해 싶었으나 현실과 이상은 달랐다. 이 직업 아주 좆같았다. 다 좆같은 와중 제일 좆같았던 건 사람 만날 일이 많다는 것이었는데, 나 같은 폐쇄적 유형의 인간은 그냥 졸도하고 싶을 정도였다. 방송국에 들어갔으면 취급은 좀 나았으려나. 근데 공채 붙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더라. 나 같은 사람 몇이 모인 외주제작사가 종착역이 되었다. 프로그램 제작보다 스탭 할 만한 직원 몇 사람 구하는 콜이 더 많이 들어오는, 어째 좀 허술한 곳. 이게 제작사야 용역업체야. 사람들은 우리 팀이 호흡하는 인건비로 보이는 모양인지 쌔빠지게 굴렸다. 가끔 싸가지 없게 갑질도 좀 해줬다. 더 억울한 건 같은 카메라 같은 붐마이크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랑 방송국 애들 대하는 태도가 하늘과 땅 만큼 달랐다는 거였는데. 걔네 취급도 그리 좋진 않았다만 걔네가 수드라라면 우린 불가촉천민 쯤 된다고나 할까. 우리는 그곳에서 카스트 안과 카스트 밖의 여실한 온도차를 경험하게 된다. 수드라조차 불가촉천민을 핍박했던 것이다.
아 이 시발 놈들이.
이것은 내가 카라마츠를 최초에는 별로 곱게 보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배경지식이다. 그맘때 나는 어쨌든 우리보다 취급 좋은 놈들은 존나 개새끼와 그냥 개새끼로 나뉜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카라마츠는 TV도쿄 인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고정 카메라맨이었다. 우리 팀이 거기 세트장 불려나갔던 건 내가 회사 들어온 지 이년 쯤 되었을 때였다. 아직도 기억한다. 그 날의 날씨와 날짜, 북적이던 로비, 바나나를 닮은 마스코트 나나나의 병신 같은 생김새.
‘M사에서 오신 분들 맞으시죠?’
회사 입구에서 갈피 못 잡고 헤매고 있던 우리에게 점프 수트 입은 남자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그랬다. 걔가 카라마츠였다. 액면가 아무리 높게 잡아봤자 이십대 후반이었으므로 담당 피디는 아니겠고, 이것들 또 막내 하나 대충 보냈구나 싶어 열불이 났다. 피디 행사하여 안내해 줄 정도로 중요한 인력이 아니다 이거지. 나는 자라목을 하고 카라마츠 전신을 눈으로 훑었다. 쇄골 아래까지 풀어헤친 시퍼런 점프 수트와 검은 브이넥, 화룡점정으로 금목걸이까지. 와 시발 눈갱이 이런 것인가?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지금은 지하 삼층 회사 세트장에서 촬영할 거고, 끝나면 바로 이동할 거니까 되도록 빨리 움직여주세요. 대본이 대폭 수정돼서 촬영 장소가 갑자기 늘었거든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지 혼자 이것저것 조잘댔다. 뭐 앞뒤 다 잘라먹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명령질해대는 것보다야 훨씬 낫긴 하다. 우리는 좀비처럼 힘아리 없는 모양새로 카라마츠 뒤를 따라 로비를 가로질렀다. 장비가 무거웠고 정통 락이 간절했다. 나는 좀 뒤쪽에 있었으므로 맨 앞에서 모세처럼 우리 이끄는 카라마츠 뒤통수가 파도처럼 솟았다 꺼졌다 하는 것만 볼 뿐이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저 남자 목소리 좋네. 옷은 그지같이 입었지만.
실은 나도 즐겨보던 프로그램이라 촬영이 재밌긴 했다. 정확히는 카메라 안에 담길 인간들 행동거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녹화 시간은 좀 길었지만 장비 정리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전체적으로 해산하는 분위기였고 팀원들이 슬슬 모여들었다. 집에 가자. 집 생각하니 느닷없는 힘이 났다.
그러나 꼭 나의 소시민적 행복에 초 치는 인물이 있다. 끝나고 치맥 콜? B가 손으로 잔 꺾는 시늉을 했고 피곤한 나는 서정적 뉴에이지가 사정없이 고파진다. 애들 아주 신나한다. 다 좋다고 동조하는데 귀찮아서 싫다고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격대로 대세에 편승할 수밖에 없던 상황, 누군가 달려왔다. 일제히 고개 돌렸다. 허공에서 그네처럼 춤을 추는 금목걸이의 독보적인 존재감.
‘저기, 잠시만요.’
‘…저요?’
‘네, 그쪽이요.’
애들이 수군댄다. 뒤에서 A인지 B인지가 속삭였다. 너 뭐 잘못했냐. 그러나 카메라맨 금목걸이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미약한 존재감 가진 내가 실수 하나 한 대도 알아챌 사람 아무도 없었으며 나아가 과실 저지른 기억도 없었다. 근데 좀 쫄리는 것이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상처 자국처럼 내가 나 모르게 뭐 하나 부숴먹기라도 했나 해서.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애들 먼저 보냈다. 사실 대화 핑계로 술자리 참석을 회피하고 싶기도 했다. 둘만 남자 카라마츠는 험악하게 숨을 골랐다. 나는 더 쫄아붙는다. 가만 보니 이 인간, 손에 eng 카메라까지 고대로 들고 있다. 우리 가는 낌새 보이니 급하게 뛰어온 것 같은데 나 진짜 뭐 잘못했나. 쳐다보니 미온수에 물감 탄 것처럼 서서히 얼굴이 벌개졌다.
‘저기, 저기요.’
‘아, 아 예.’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마츠노 이치마츤데요.’
‘아 이거 우연이네요. 저도 마츠놉니다. 이름도 비슷하네, 전 카라마츠거든요?’
‘아… 그러세요.’
‘네.’
‘……’
‘…저기.’
‘예.’
‘그… 이것도 인연인데 번호 좀 주심 안 될까요.’
‘…예?’
그리고 내밀어진 스마트폰.
미쳤다.
대체 그날의 나의 어떤 모습에서 호감을 느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카라마츠는 내 번호를 물었고, 나는 구하는 이마다 얻으리라 하는 성경 말씀 따라 얼떨결에 연락처를 건넸다. 그때 나는 이 행위가 소위 말하는 헌팅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첫째, 우린 둘 다 남자였고 둘째, 나 같은 인간에게 연애 좀 해보자 제안할 사람이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걔를 거부할 용의가 처음에는 충만했으나 카라마츠가 너무나도 인상 깊은 인간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병신 같은데 졸라 매력적이야. 걔의 비정상적인 언행 지켜볼 때마다 내 무채색 인생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이 스며들어 사랑스럽게 물들이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자꾸 나를 재밌게 했다. 결정적으로 환장하게 내 취향인 목소리. 핸드폰 녹취 기능에 눈 감고 뜰 때마다 감사한다. 살 맛 난다 싶을 때 쯤 난 이미 핸드폰을 십 분에 몇 번씩 들여다보는 말기 중독 증세 보이고 있었다. 카라마츠에게 연락이 왔나, 안 왔나. 그게 그렇게 궁금해서.
걔를 내 애인이라고 정의하기 위해 나는 꾸준히 의심했고, 필연적으로 비논리적일 사랑에게 해답을 요구했으며, 징그럽게도 열렬한 밀당을 자행했다. 스스로도 존나 피곤한 인간상이라고 생각했으나 태생이 방어적인 인간에게 속마음은 불가침의 영역이었으니. 더해 우리가 하려는 건 동성애 규탄하는 사회의 미개한 시선 좆 까는 우주급 마이웨이 실력을 요하는 연애가 아니던가. 그러나 카라마츠는 보살 수준의 인내를 자랑하며 나를 개봉했다. 어느 날 걔가 내게 몇 십 번째 잘 자요 문자를 남긴 것을 뒤늦게야 확인했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아, 나 지금 연애하는 게 맞구나.
시작이 그래서 내가 너무 자만했던 것인가.
바흐만 다섯 번 돌아간 것 같다. 장르 노선 틀어 알앤비 듣기로 했다. 난 술은 해장술로 매운 건 더 매운 걸로 풀어야 한다는 다다익선식 신념 가진 사람이었기에. 헤드셋 너머로 우는지 노래하는지 모를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우울에 깊게 잠겨 또다시 생각했다. 우리 연애랑… 다시 또 카라마츠.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지만 내 생각에 연애란 일종의 계약이었다. 주로 쌍방향 사랑을 전제로 하는 단내 나는 결속 의식. 그러므로 인간은 계약한 타인을 위하여 연인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 연애 의무라는 깜찍한 족쇄에는 주로, 주기적으로 전화 또는 문자하기, 될 수 있으면 자주 만나 얼굴 보기, 타협한 만큼의 스킨쉽, 제 3자와 동일한 계약 맺지 않기 등이 있겠다. 그것들 모두 적힌 비가시적 계약서 맨 아래엔 이런 조항 분명 있을 것이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않을 경우 상대의 참을성과 애정의 크기에 반비례하여 만료 일자를 앞당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어느 정도까지 인내할 수 있고 또 어느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가.
카라마츠는 처음부터 내가 너무 좋아 죽겠다며 일명 사랑의 노예 된 듯 굴었다. 사탕 녹인 것 같은 되게 단 말들을 쪽팔리지도 않은지 잘도 해댔다. 난 반면 천성이 그런 거 못하게 태어났기에 주기보다는 받는 쪽이었다. 연애가 처음이라 그런지 뭘 해주는 게 서툴렀다. 내 애정을 카라마츠는 네잎클로버처럼 대했으나 내게 카라마츠 애정은 이미 일상이었다. 요는 카라마츠는 이미 많은 것을 참는 연애를 해왔다는 것. 그리고 내겐 나를 향한 카라마츠 사랑의 잔여량이 얼마인지 알 수 있는 편리한 도구 따위 없었다. 잔인한 현실 위로 겹쳐지는 카라마츠와 여자와 금은방 풍경. 끔찍한 결론 도출 된다.
카라마츠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씨발 노래 드럽게 못 하네.”
헤드셋 팩 집어던졌다. 내 청력 분명 저하됐을 것이다. 음향 일 하는 놈이 소리를 못 듣게 되다니. 안되겠다, 죽어야지. 죽어야겠다. 죽고 싶다. 누가 나 좀 죽여주라 제발.
비척비척 방 밖으로 나와 보니 애들이 어느새 아이스크림 사서 하나씩 빨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무척 무기력하게들 보고 있다. 야 니 건 없지롱. B가 아이스박스 통 흔들며 지랄했다. 아 저 눈치 없는 새끼 진짜. 수저로 빙수 떠먹던 C가 내 표정 보더니 숟가락 한 번 쪽 빨고 물었다. 너 뭔 일 있냐. 무슨 일 아주 있었으나 고개 저으며 현관 쪽으로 돌아섰다. 애인 바람피우는 장면 목격했다는 사연 구구절절 늘어놓고픈 기분도 아닐뿐더러 늘어놓을 수도 없었기에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 오히려 더 외로워질 것 같았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화들짝 놀라 액정 보니 카라마츠다. 나는 대뜸 전화 끊었다. 심장이 널을 뛰었다.
헤어지자고 하면 어떡하지.
핸드폰은 두세 번 더 길게 진동했다. 아 씨 그만 좀 해라. 나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플리스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엘리베이터가 일층에 있는 것도 맘에 안 든다. 엘베 오기 기다린 시간만큼 내려갔다. 오피스텔 입구 빠져나가는데 누가 내 손목 덥석 잡는다. 거진 습격이었다. 척추 타고 식은땀 흐르는 듯 했다.
빼도 박도 못하게 카라마츠일 걸 알아서.
“이치마츠, 전화 왜 안 받았는가?”
사귀고 난 뒤로 카라마츠가 고집하는 병신 정점 달리는 연극풍 말투가 너무도 익숙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작은 동작이 영겁의 시간을 거쳐 이어지는 것만 같다. 상황 파악 못 하고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눈물 나게 반가웠으나 모순되게도 그 어떤 때보다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여자와 반지를 고르고 난 뒤, 나를 찾아온 카라마츠. 사유야 불 보듯 뻔했다. 난 거의 겁에 질려서 카라마츠 쳐다본다. 카라마츠가 뱉을 말이 너무… 무서워서.
“안색이 좋지 않은데. 어디 아픈가?”
“…아프긴. 니가 여긴 어쩐 일이냐.”
“어쩐 일이긴, 못 본지 한참 됐지 않은가. 슬슬 영화 크랭크인 할 때라 혹시 도쿄에 돌아왔을까 해서 와 봤는데, 정말 있을 줄이야! 이건 운명이다, 이치마아츠!”
평소처럼 오버하며 내 손을 꽉 쥔다.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말투와 행동에 나는 슬금슬금 카라마츠 눈치 살폈다. 죄책감이나 곤란함 따위의 감정들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해맑은 얼굴 보이고 있다. 눈을 껌벅였다.
헤어지자고 말하러 온 게 아닌가.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 이치마츠. 일이 많이 바빴는가?”
“…똑같았지 뭐. 너는 좀 어땠어.”
“훗, 난 항상 파인한 하루를 보냈지. 핸드폰에 저장된 마이 리틀 캣… 너의 사진을 보면 신이 내게 내려준 신성하고 프레셔스한 기운이…”
중략.
“…해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 그러세요.”
지랄, 반지 사려고 왔다 들른 거면서 어디서 약을 팔어. 카라마츠는 수세미로 접시 문대듯이 내 손을 꽉 잡고 눌러댔다. 조물딱댄다. 야매 손 마사지사나 할 법한 다소 고통 주는 행위였다. 이 새낀 자기 악력이 얼마나 센지 모르는 것인가.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붉게 물들었다 하는 걸 본다. 카라마츠 엄지가 내 손가락 위로 지나갔다. 암 것도 없이 깨끗한 뼈와 살덩어리.
우린 거의 오 년을 연애했지만 반지를 맞추지는 않았다. 약지를 두른 장신구 본 누군가에게 어 너 애인 있냐 하며 질문 공세 받을 바에야 차라리 애인 있는 티 안 내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내가 주장한 의견이었고 카라마츠는 내 뜻에 따라준 것뿐인데 일이 이렇게 되니 사귄지 오 일만에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커플링 장만할 걸 후회가 되는 거다. 다른 연애 종족들이 커플링 커플룩 커플세트 등등에 무슨 연유로 그렇게까지 목을 매는지 과거의 나는 왜 알지 못했던 것인가. 그건 자기들 사랑을 증명해줄 무언가의 존재에 대한 당연한 집착이다. 더해 그것들은 주인을 대신하여 제 3자 향해 떠들어주는 기능 하니까. 내 심장은 병신이다… 그래서 얘 하나밖에 사랑할 줄 모른다… 대강 그렇게.
가장 효과가 좋은 게 커플링임은 자명하다. 아까 카라마츠가 웬 여자랑 고르던 거. 현재진행형 연애의 상징. 속에서 울컥 뭐가 터져 나오는 것 같다. 당장 카라마츠 멱살 잡고 그래서 그 여자랑 나랑도 안 맞춘 커플링 나눠 끼고 사귄다고 광고하고 다닐 예정이냐 외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카라마츠는 여전히 양손으로 내 왼손 잡고 비비는 중이다.
“아프다 새끼야.”
“아, 미안하다.”
그래도 손을 놓지는 않는다. 내가 얘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내가 별 지랄 다 하며 밀어내도 절대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 것.
…그러나 물을 수 있을 리 없다. 오늘 너를 봤다는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혹시 정말로 이제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애정을 교환할 것이라 대답할까봐 겁이 나니까. 연애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다. 합의 없이도 해지될 수 있다는 것. 카라마츠와의 연애를 인정하고 얼마동안은 걔가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을 경우 내게 벌어질 모든 일들을 가정하며 살았다. 말했듯 나는 방어적인 인간이니까. 우리가 다시 남이 되면 어떡하지. 내가 계속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이미 그때 걔가 존나 너무 좋았던 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 없다. 여전히 걔가 좋고 여전히… 끝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마음 같아선 안아주고 싶은데, 밖이니까.”
“웃기고 있네. 지금 이것도 충분히 이상하거든.”
“그래…”
카라마츠의 손이 멈췄다. 손끝이 굳어있는 걸 느낀다. 사랑에 비례하게 이별은 공포스러워진다.
“저기… 이치마츠.”
그리고 나는
“토요일 저녁에 시간 있는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서 있지만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
사실은 발밑이 무너진 것처럼
“이치마츠?”
“무슨 말?”
“그, 중요한,”
“지금 하면 되잖아.”
“여기서 할 말은 아니다.”
뭐 얼마나 대단한 말씀을 하시려고. 평소같은 시비조에 카라마츠가 내 눈을 피하며 발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얘가 내 시선에서 도망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카라마츠를 추궁하고픈 마음과 토요일 저녁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나도 내가 뭘 바라는지 모르겠다. 왜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진실과 마주보기를 원하는 건지. 어쩌면 나는 이별 외의 다른 답변을 기대하고, 믿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 이치마츠, 토요일에 보자.”
“…어어.”
우리는 약속을 잡고 헤어졌다. 아주 오랜만에 만났으나 재회는 짧았다. 항상 내가 바빴는데 오늘은 카라마츠가 먼저 떠났다. 지가 새벽 별도 아니고 반짝 떴다 사라지냐. 나는 아무 이유 없이 그 주변 길을 뱅뱅 돌다 돌아갔다. 문 따고 들어가자마자 또 방에 틀어박혀 새우처럼 웅크려 누웠다. 음악 들을 마음도 안 드는 게 여간 심각한 상태가 아니다. 열없이 눈을 감았다.
그래도 5년 간 쌓아온 관계의 마지막을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이야기하지는 않을 정도로는 나를 좋아했구나, 싶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우리 약속은 여덟시였지만 나는 그 전날 세시부터 상당히 예민한 상태였다. 아니 씨발 애인이 헤어지자고 말 할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얌전히 있을 수 있겠나. 그렇다고 내가 걔와의 이별을 무산시켜보려 새삼 대단한 연애 공적을 세운 것도 아니었다. 난 항상 수동적이었고, 쥐 좆만도 못한 자존심을 이럴 때만 세웠으며, 모든 용기가 필요한 일을 카라마츠에게 떠넘기며 사랑했으니까. 내 마음만은 필사적이었으나 몸은 시체처럼 뻣뻣했다. 카라마츠가 어떻게 나랑 5년을 만났는지 너무나 존경스럽고… 이해가 안 가는 거다. 왜 걔 같은 애가 나 같은 새끼랑. 걔도 존나 이상한 놈이지만 난 정말 핵노답이고 연애 상대로는 더더욱 아니올시다인데.
“이치마츠 너 오늘 어디 나가냐?”
“…어 왜.”
“아니 웬일로 옷을 그렇게 입었나 해서. 맨날 방구석 폐인처럼 하고 다니는 놈이.”
“너한텐 안 듣고 싶은데. 넌 면도도 안 하잖아.”
수염 기르는 중이거든. 되도 않는 말 씨부리는 C를 무시하고 조끼를 머리에 뀄다. 마지막까지 후줄근한 모습 보인다면 카라마츠 밑바닥에 남은 정 다 털릴 것 같아서 인터넷 뒤져 내가 가지고 있는 옷을 활용할 수 있는 가장 봐줄만한 코디를 찾아냈다. 이십칠 년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노력이다. 진작 이럴걸. 이제 와서 이래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다. 이러는 새삼스러움이 너무 싫었다. 십 분마다 한 번씩 약속을 깰까 고민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별에 부딪힐 날이 올 것을 안다. 오늘이 그 날이고.
약속 장소로 가는 내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울지 말자고 백 번째 다짐했다. 끝이니만큼 구질구질하고 추해보이더라도 내가 잘할게 외치며 카라마츠 발목 정도는 잡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러는 내가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거다. 내가 좀 더 적극적이고 솔직했더라면 우리 사이는 괜찮았을까. 나는 감히 너무 쉽게 사랑 받고 사랑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이이치마츠, 왔는가!”
“어.”
카라마츠 만나자마자 다시 돌아가고픈 충동이 일었다. 이 새끼 아주 작정하고 왔다. 사귀면서 단 한 번도 얘 정장 입은 거 본 적이 없는데. 카라마츠는 내 범상치 않은 사복에 감동한 듯 별별 찬사를 늘어놓으며 주인 만난 개새끼처럼 굴었다.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거다. 카라마츠가 내 시체 목을 잘라 두 번 죽여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당장에라도 무릎 꿇고 사과와 자책과 앞으로의 다짐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역시 나는 그렇게 못 하더라.
카라마츠와 나란히 걸었다. 카라마츠는 이러는 거 몹시 오랜만이라며 손 못 잡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연기 아주 수준급이다. 끝까지 너는 왜 그렇게 착하게만 구니. 반쯤 넋 나간 채 걷느라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문득 주변 둘러보고 당황한다.
“야 잠깐만.”
“왜 그러는가 이치마츠?”
“우리 여기 들어갈 거야?”
“그렇다.”
“여기 호텔… 레스토랑?”
“응.”
네가 돈이 어딨다고. 입구서부터 고급진 냄새가 난다. 확실히 카라마츠는 나보다 벌이가 좋은 편이긴 했으나 저녁 한 끼 해결하기 위해 4성 호텔 레스토랑에 발 들일 정도로 여유 있는 놈도 아니었다. 이건 뭐 이별 이벤트니. 아 시발 우리 진짜 헤어지나 봐.
심지어 예약을 해 놓으셨단다. 그것도 창가 자리, 야경이 죽여주게 예쁘다는 명당. 죽여주게 예쁜 건 모르겠고 네온사인 번쩍번쩍하는 도시 한복판으로 통유리 깨고 떨어지고 싶을 정도로 내가 지금 죽고 싶다는 것만 좀 알겠다.
숟가락 포크 나이프가 다섯 개씩 등장했다. 웨이터가 에피타이저라며 그냥 먹어도 눈 뒤집어지게 맛있을 빵에 브로콜리 수프를 내왔다. 나는 멀어져가는 트레이를 멍하니 보다 빵 바구니로 시선을 돌렸다. 카라마츠는 야경 보며 감탄 중이다. 아… 얘 이런 거 좋아했지. 유원지 관람차 꼭대기에서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기름 떡칠한 대사를 지껄이던 카라마츠가 불현 듯 떠오른다.
분위기에 껌벅 죽는 놈이니 이런 중대 사안 발표하려면 이 정도 기합은 넣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카라마츠는 가끔 가다 내 눈치를 보며 자기 얘기를 했고 나는 그 어떤 때보다 진지하게 걔 말을 경청했다. 헤어지는 날 사귀던 그 어떤 때보다도 더 애인처럼 굴다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집안 물건 다 털리고서야 현관문 다는 격이다.
“이치마츠, 오늘 왠지 더 상냥한데.”
“상냥은.”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니면 여기가 마음에 안 드는가?”
“그럴 리가 있냐. 그냥 너 돈이 어디서 났나 해서.”
“아, 나 고정 몇 개 더 잡게 돼서.”
뭣이라.
“너 지금도 맡은 거 많지 않냐?”
“훗, 나의 고져스한 센스로 카메라에 담는 모든 것들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바람에”
그랬구만. 돈줄 늘고 신분 상승하니 옆에 붙은 쓰레기가 더더욱 같잖게 보였던 거구만. 카라마츠와 함께 반지를 고르던 여자 외형을 떠올렸다. 예뻤지 아마. 능력 있는 자가 미인을 차지하는 법이다. 그 말인즉 능력 있는 자가 별 볼 일 없는 사회 하층민과 연애하는 것은 몹시 손해라는 것인데.
자기 비하가 내핵을 뚫는다. 나는 다음 코스라며 나온 해산물 요리를 기계적으로 씹었다. 이게 가재군.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카라마츠가 내 표정 보더니 눈썹을 늘어뜨렸다.
“맛 없나 이치마츠?”
“아니 맛있어. 존나 맛있다 이거.”
“표정이 좋지 않은데.”
“암 것도 아니야. 야 이런 것도 먹고 오늘 무슨 날이냐.”
말 뱉은 직후 후회했다. 무슨 날인지 뻔히 아는 놈이 무슨 날인지 묻다니 이거 완전 지 무덤 지가 파는 거 아냐. 카라마츠가 아랫입술을 깨문다. 그리고 목울대가 출렁. 직감했다. 올 것이 왔다. 저기, 이치마츠,
“야 빨리 먹고 가자.”
“응?”
“나 할 거 생각났어. 가야 되니까 빨리 먹자고.”
“자, 잠깐만, 이치마츠,”
나는 해산물에 딸려 나온 새우 볶음밥을 자비 없이 퍼먹기 시작했다. 씹는 둥 마는 둥 하며 음식물 삼켰다. 카라마츠가 당황한 얼굴로 물잔 들이댔지만 무시하고 꿋꿋이 식사했다. 목 막힌다. 눈앞이 부예진다. 씨발… 존나 맛있네.
도저히 안 될 것 같다. 난 못한다. 내가 어떻게 카라마츠 입에서 나오는 우리 헤어지자 내지는 이제 그만 하자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나를 희대의 몰염치한 놈이라고 비난해도 좋다. 하지만 그동안 식물처럼 사랑만 마시고 자란 내게 이렇게 느닷없이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 통보하는 것은 말라 죽으라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 아닌가. 너무나 잔인하다. 잔인해. 나는 너무 잔인한 연애를 했다. 카라마츠에게 미안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왜 걔가 선인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던 건지. 그렇게 줄 사랑이 많은 놈이니 받아야 할 사랑도 많았을 것이다. 나 같이 말라버린 수도 행세하는 사람이랑 사귀느라 고생 많았다 카라마츠. 근데 내가 다 잘못했고 이제 잘 할 테니까, 앞으로도 좀만 더 고생해주면 안 될까……
내 엄지만한 새우를 전투적으로 씹었다. 나 왜 이렇게 이기적이지. 내가 카라마츠였으면 사귄지 일주일 만에 내게 질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별 후 아예 무너질 내가 너무 두려웠다. 아직도 존나 이기적이다. 그래서 헤어지자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오늘은 안 된다. 내일도 안 되고 내일 모레도, 글피도…
“아!”
“이치마츠, 헉,”
“아 이거 뭐,”
어금니가 진동했다. 뺨부터 턱까지 모조리 감싸쥐고 입을 벌렸다. 내가 만약 여기서 운다면 당연히 감정에 체해서거나 카라마츠를 붙잡기 위해 본능적으로 눈물이 터지리라 생각했는데, 다 됐고 아파서 눈물 났다. 휴지도 없이 손바닥에 그대로 씹던 볶음밥을 뱉었다. 돌도 아니고 대체 뭘 씹은 건지. 카라마츠가 냅킨을 건넸고, 나는 냅킨으로 뱉어낸 음식을 훔쳤다. 아마도 파프리카로 추정되는 붉은 야채와 밥알들, 반 토막 난 새우, 그리고…
반지.
나는 코를 훌쩍였다.
“이치마츠, 어떡해, 이 나간 거 아닌가? 그렇게 급한 일이 있으면,”
“이, 이거 뭐야.”
“이치마츠 이,”
“내 이는 됐으니까 이거 뭐냐고.”
설마 음식 만들다 반지가 빠진 건 아닐 것이다. 고개 들어 카라마츠 보니 신음 흘리며 마른세수 한다. 손 틈으로 보이는 얼굴 무척이나 민망하다. 카라마츠가 열 오른 얼굴로 내 손에서 반지를 집어 들었다.
“내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나는 이치마츠가 입에 넣기 전에 반지를 발견할 줄 알았다.”
“…뭔데 이거.”
“그게…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찾다 보니 이런 게 나와서.”
카라마츠가 정장 주머니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그걸로 정성껏 반지 닦는다. 나는 눈만 껌벅이며 결박이라도 된 것처럼 의자에 앉아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우리 사귄지 오 년이나 됐고, 나는 이제 수입도 늘었고 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이치마츠도 바쁘긴 하지만 그쪽에서 나름대로 자리 잡은 것 같고.”
“……”
“그러니까, 물론 일본에서 결혼은 어려울 테니까, 사실혼 관계 정도로 살아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해서. 둘이 살기 좋은 집도 봐 둔 게 있거든. 이치마츠 의견은 아직 듣지 않았지만…”
“……”
“나는 이치마츠와 더 오래 함께 있고 싶다.”
미쳤다.
창문 밖으로 자동차 라이트와 건물 조명과 네온사인이 번쩍인다. 레스토랑 안을 가득 채운 음악은 하이든의 종달새다. 내 앞에 놓인 화이트 와인 잔과 생선 요리, 바깥부터 사라진 포크와 나이프, 그리고 반지. 그걸 내 왼손 약지에 조심스레 끼우는 카라마츠. 카라마츠.
넌 진짜… 병신이구나.
울컥 눈물이 터졌다. 카라마츠가 경악해서 나를 본다. 이 나이 먹고 쪽팔리게 울고 싶지 않았는데, 어떻게 지금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카라마츠가 엄지로 내 눈가를 닦았다. 왜 항상 내 미숙함과 이기적임을 너는 더 큰 사랑으로 덮어 나를 삼켜버리는 건지. 화상 입힐 정도로 뜨겁지는 않지만 항상 고집스럽게 따뜻한 걔의 사랑. 안다. 이건 카라마츠가 손해 보는 관계다. 하지만.
“너, 너 완전 적자 끌어안고 사는 건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너 진짜 후회할 거다, 오늘 돈 쓴 거랑…”
“이치마츠, 후회 안 한다니까.”
“……”
“그때 너를 붙잡은 순간부터,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어.”
하지만 이제 그렇게 두지 않을게. 카라마츠를 사랑 재벌로 만들어주고 싶다. 걔 통장에 예치된 사랑은 모두 내 거다. 노력할게, 너만큼은 못할 게 뻔하고, 너무 힘들겠지만… 나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걸 하는 것뿐이고, 넌 지금까지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으니까.
나는 카라마츠 몫의 반지를 걔 약지에 끼웠다. 잘 맞는다. 그게 또 감격스러워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 관계 생경하다. 이럴 때 보통 우는 건 카라마츠 쪽이었다.
“반지 딱 맞네.”
“이치마츠는 나랑 손 크기가 똑같으니까. 이 또한 운명”
“예 예.”
울 땐 언제고 반지 번쩍이는 손 두 개 보고 있으니 웃음이 슬슬 터진다. 카라마츠는 아예 턱 괴고 날 보며 실실 웃고 있다. 행복하단다. 이사 계획 세우자며 난리다. 밥부터 먹으라고 손수 포크 쥐어줬다. 아 이거 맛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오늘은 자기 전에 아이돌 앨범 돌리리라 다짐한다. 사랑을 하니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인다고 소리치는, 제일 오글거리고 제일 한심하고 제일 사랑스러운 걸로.
“근데 너 그 여자 누구야.”
“여자?”
“너 반지 고를 때.”
“헉, 이치마츠, 봤는가?”
“그냥 지나가다 봤는데, 내가 모르는 얼굴이던데.”
“나 새로 들어가는 프로그램 코디…”
“…너 아주 사이 좋아 보이더라.”
“사촌 누나다.”
“이 새끼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