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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Track - Unknown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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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사람아.
(평사원 카라마츠X락밴드 이치마츠)

W.림좌

 

 

"...이걸 어쩐다."

카라마츠는 제 손아귀 위의 구겨진 티켓을 조심스럽게 다잡아 폈다. 그 티켓의 정체는 클럽의 무대를 빌려 공연을 한다는 인디밴드의 공연티켓으로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먼 카라마츠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심지어 공연날짜는 오늘. 카라마츠는 손안의 티켓과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번갈아 보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카라마츠는 블랙회사의 직원이었다. 말 그대로 블랙기업. 철야는 필수요, 야근수당 같은 건 있지도 않다. 연속 4일, 5일 철야 같은 일도 드물지 않은데다가 그쯤하면 솔직히 곧 쓰러져 죽을 것만 같은 생명의 위협마저 느껴진다. 그럼에도 여러 사정상 회사를 그만 둘 수 없는 카라마츠가 이 지긋지긋한 블랙회사에서 숨을 깎아 온지도 벌써 5년 째였다. 그리고 블랙기업 평사원 마츠노 카라마츠와 콘서트 티켓의 상관관계를 묻는다면, 시간은 어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철야. 다만 조금 힘든 점이 있었다면 그것이 오랜만의 4일 연속철야였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문제인 것일까, 그렇다고 따로 운동할 시간은 없는데. 비틀거리며 골목길을 걸어가던 카라마츠는 결국 자신의 보금자리에 몸을 뉘이지 못하고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져 얼굴을 묻었다.

*

부글부글, 카레가 끓는 단내가 카라마츠의 후각을 자극했다. 카라마츠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올려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가구와 보송보송한 이불, 생면부지의 얼굴. 카라마츠는 순간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그럴 기력도 없는 성대 덕에 조용히 처음 보는 청년과 눈을 맞출 뿐이었다.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해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말을 삼켰더니 긴 보랏빛 머리의 청년이 성큼성큼 다가와 카라마츠의 안색을 살폈다.

"일어났네, 아저씨?"

조금 낮은 음역의 허스키보이스에 앳되어 보이는 얼굴. 10대 후반, 많아 봐야 20대 초반일 듯한 청년이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처음 보는 사람을 선뜻 이렇게 집에 재워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제 몸 하나 건수 하지 못 해 신세를 진 카라마츠가 감히 건넬 충고는 아니었다.

"그.... 그러니까, 여기는."
"여기는 내 집. 어제 아저씨가 골목에 쓰러져있길래 일단 데려왔지. 거기 그대로 쓰러져있었으면 납치당해서 장기 털렸을 걸?"
"장기...."

비일상적인 이야기이나 맞는 말이었다. 집값이 싸고 외진 이 구석의 동네는 좋지 않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꽤 살고 있었다. 그대로 쓰러져있었다면 정말로 납치당해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장기매매로 해체 당했을지 누가 아는가.

"...우선, 구해줘서 고맙다. 수상한 사람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다오."
"알아, 당신 가방을 좀 뒤졌거든. 마츠노 카라마츠. 나이 30. 블랙기업 회사원. 여기까지 알면 안 봐도 뻔하지, 며칠이나 철야로 작업하다 쓰러지는 인간들이 드문 것도 아니니."
"그런가.... 다시 한 번 정말로 고맙다."
"인사는 됐어. 아, 카레 먹을래? 배고프지?"
"아니, 그렇게 까지 신세를 질수는....!"

꼬르륵. 카라마츠가 도리질을 치기도 무색하게 본능에 충실한 위장이 눈치도 없이 잔뜩 수축하며 공복을 호소했다. 청년이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푸흣.... 기다려, 금방 가져올 테니까."

부엌으로 걸어간 청년은 달그락거리며 카레를 그릇에 담아 카라마츠에게 가져다주었다. 양손에 카레그릇을 하나씩 든 것을 보아 청년 또한 공복이었던 모양이었다. 내밀어진 카레그릇을 받은 카라마츠는 잠시 고민했지만 옆에 주저앉은 청년이 먼저 카레를 한입 크게 입안에 집어넣는 것을 보고 덩달아 수저를 들었다. 어색하게 한입 떠먹은 카레의 맛은 훌륭했다. 물론 그것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카라마츠의 미각세포가 오인한 탓이 크겠지만 어쩐지 그리운 골든 카레의 맛은 정말로 맛있었다.

"아저씨라고 불러도 화 안 내네?"
"그거야 뭐... 이정도 나이면 그렇게 불릴 만도... 하하."
"흐응~"
"그런데, 그, 너는 이름이...?"
"아아, 진짜 기억 안 나는구나."

순식간에 깨끗이 비운 두개의 카레그릇을 치운 청년은 다시금 카라마츠의 이불 맡에 주저앉아 말을 건넸다. 카라마츠는 그제야 자신이 청년의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심스레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카라마츠의 예상과는 조금 많이 멀었다.

 

"어...엣....그, 저, 그러니까..... 우리가...."
"별로, 기억 안 나면 상관없어."

 

카라마츠는 당황했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임팩트있는 보랏빛 머리라면 잊을 리가 없는데도. 카라마츠는 당황해서 버벅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다행히 청년은 그런 카라마츠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청년은 태연히 근처의 서랍을 뒤져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그 안의 내용물을 꺼내 카라마츠에게 건네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치마츠. 내 이름, 이치마츠라고 해."
"...그건?"
"공연 티켓. 나 일단은 공연하고 있거든. 아, 이제 나가봐야해서 말이야. 열쇠 여기 두고 갈 테니까 나갈 때 문 잠가줘."
"저기, 이치마츠군..."
"딱히 오기 싫으면 안 와도 상관없긴 해. 그럼 먼저 나갈게."

이치마츠는 폭풍처럼 제 할 말만을 끝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라마츠가 그를 막아야 하는지, 혹은 그를 따라 일어서야하는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와중 결국 이치마츠는 야속하게도 문을 닫고 나가버렸고 작은 방 안에는 카라마츠만이 덩그러니 남아 갈 곳 잃은 손을 허공에 뻗고 있었다.

"......어라...진짜...?"

대답 없는 물음이 허공에 흩어졌다. 정말로 집안에 남은 건 카라마츠 뿐이었다. 카라마츠는 손을 내리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우선 이불에서 벗어나 머리맡에 놓인 자신의 서류가방을 살폈다. 서류들과 휴대폰은 다행히 무사했다. 카라마츠는 우선 휴대폰을 켜 배터리와 연락기록을 확인했다. 배터리는 반 정도 남아있어 걱정 할 필요가 없었지만 연락 기록 쪽은 조금 달랐다. 부재중 전화 5통, 부재중 문자 13통. 카라마츠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굳은 눈동자를 굴려 시계를 확인하니 이미 출근 시간을 훨씬 넘긴 시각. 카라마츠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서류가방 옆에 놓여있던 정장을 걸치고 집의 열쇠를 찾았다. 신세를 져놓고 문 하나 제대로 잠그지 못 할 수는 없었다.

 

서두르던 카라마츠가 흩어진 서류조각들을 다시 가방 안에 집어넣는 도중 공연 티켓이 든 봉투가 그 안에 함께 섞여들어 간 것은 우연으로, 그렇게 3시간이나 지각해버린 카라마츠의 시간은 다시 현재에 이른다.

 

*

 

"뭐야, 카라마츠 3시간이나 지각해놓고 또 딴 짓?"
"....아닙니다."
"아니기는, 뭐야 그거? 티켓?"
"이, 이건...앗, 오소마츠 대리!"

부서의 난봉꾼이라 불리는 오소마츠 대리가 멍하니 티켓을 살피던 카라마츠에게 다가와서는 말을 걸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들고 있는 티켓에 지대한 관심을 쏟더니 카라마츠가 방심한 틈을 타, 빠른 손놀림으로 카라마츠의 티켓을 빼앗아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뭐야 이거, 밴드 아카츠카 공연이잖아? 가격 좀 나갈 텐데 카라마츠 이거 어떻게 샀어?"
"그게, 그건 받은거라..."
"그래? 어쩐지 오늘 저녁 공연이더라. 2시간 반 남았네, 갈 거야?"
"그러니까, 그게...."

오소마츠는 티켓을 카라마츠의 눈앞에서 팔락이며 빙글빙글 웃었다. 까딱 잘못하면 그대로 티켓이 오소마츠의 수중으로 넘어갈지도 몰랐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오소마츠다. 비싼 티켓이라면 분명 프리미엄 암표거래로 팔아먹고도 남을 것이다. 평소라면 공짜로 얻은 티켓이고, 넘겨버려도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어쩐지 오늘만큼은 조금 달랐다.

"안 갈 거면 이거 나주라, 카라마츄~! 어차피 너도 공짜로 받은 거라며?"
".....다."
"응?"
"...그거, 갈 거라서 못 드리겠는데요."
"에엑, 진짜 갈 거야? 카라마츠 공연 같은거 봐도 모르지 않아~?"
"말 안 했던가요, 저 고등학생 때는 연극부였다고."
"엑, 그거랑은 상관없지 않음?"

항상 카라마츠에게서 뜯어가기만 하는 오소마츠에게의 반항심리였을까, 신세를 진 이치마츠에게의 의리였을까.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랴. 카라마츠는 티켓을 오소마츠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으며 공연을 직접 보러가고 말겠다는 고집마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거, 이제 2시간 밖에 시간 안남은거 알지?"
"압니다."

블랙기업에 취업하고 항상 자신을 낮추며 일해 왔던 카라마츠지만 사실 카라마츠는 고집이 센 편이었다. 한번 하겠다고 정한 일은 끝까지 해내는 심줄.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의 말을 듣고 바로 책상서랍 안에서 2개의 봉투를 꺼냈다. 하나는 티켓이 들어있었던 흰 봉투였고, 나머지 하나는 회사에 입사하고 줄곧 서랍 안에서 먼지를 먹고 있던 휴가신청사유서였다.

"우와... 진심이야?"
"그럼, 저는 먼저."
"그래 가라, 용자 카라마츠!"

아무리 블랙기업이라도 연차, 월차제도는 존재한다. 다만 한번 휴가를 내면 돌아왔을 때 책상이 사라져있다던가 역으로 서류더미가 책상의 딱 세배만큼 쌓여있다던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존재는 하지만 유명무실한 제도에 가까웠다. 카라마츠는 떨리는 손으로 휴가 서류를 제출했다. 5년간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휴가이니만큼 부디 잘리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갖고 있지 않은 카라마츠의 이동수단은 당연하게도 전철이었다. 퇴근 시간이 아닌 조금 이른 전철은 평소보다 확연히 한산했고 덕분에 카라마츠는 좌석에 앉아서 갈 수 있었다. 다만 그 덕분인지 덜컹거리는 지하철의 진동에 몸을 맡기는 순간순간 온갖 상념이 카라마츠의 머릿속을 들쑤셨다. 홧김에 서류를 제출하고 나오기는 했지만 과연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걱정이 들지 않는 것은 또 아니었다. 시간은 카라마츠의 불안과 초조함을 배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 카라마츠가 숙인 고개를 들어 역을 확인했을 땐 벌써 도착역의 이름이 안내판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서류가방을 챙겨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티켓에 인쇄된 지도상으로는 목적지인 클럽은 전철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티켓 한 장을 길잡이삼아 초췌한 발걸음을 옮겼다.

 

후줄근한 정장과 더러워진 넥타이, 낡은 서류가방과 깊게 팬 다크서클. 여기저기서 청년들이 청춘을 구가하는 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고 카라마츠는 느꼈다. 노을이 지난 남빛의 거리의 사람들은 자신감을 갖고 삼삼오오 걷거나 얘기를 나누거나 혹은 길거리 공연을 했다. 청춘의 색이 이러할까. 카라마츠는 5년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아직 청춘의 끝자락이라고도 할 수 있었을 그때. 억지로 회사에 입사하기 직전, 마지막의 마츠노 카라마츠. 카라마츠라고 원해서 이런 삶을 택했을 리 없었다.

 

"잠깐, 여긴 오늘 영업 안합니다."

 

멍하니 걷다보니 어느새 공연장이 있는 클럽건물에 도착했는지 가드로 보이는 검은 재킷의 남자가 카라마츠를 가로막았다. 가드는 카라마츠를 시기 이른 취객으로 여겼는지 문답무용으로 이 앞은 출입금지라며 어깨를 밀쳤고 카라마츠는 자신의 모습이 그 정도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손안의 티켓을 내밀었다. 가드는 한참을 카라마츠의 얼굴과 티켓을 번갈아보더니 무척이나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는 입구를 열어주었다. 카라마츠는 조금의 유쾌함을 담아 발자국을 내딛었다. 가드가 입구의 문을 닫자 좁은 계단의 불이 켜졌다. 공연장은 지하인지 계단의 끝에는 또 하나의 두꺼운 문이 달려있었다. 카라마츠는 조심스럽게 한 손을 뻗어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두근, 두근, 두근. 순간 심장의 고동소리인가 착각한 그것의 정체는 두꺼운 철문을 밀어젖힌 바로 그 순간 여과 없이 카라마츠의 뇌수를 흔들었다. 터져 나오는 함성소리. 심장을 뒤흔드는 피아노와 드럼의 빛 무리. 몇 배는 증폭된 보랏빛 일렉기타의 리듬. 폭발의 정중앙, 마이크를 잡고 흥분을 제 맘대로 이끄는 새빨간 선장.

 

"아."

 

밴드공연이란 이런 것이었나. 카라마츠는 성대를 치고나오는 탄식과 같은 음절과 함께 손에 쥐고 있던 서류가방을 바닥에 떨궜다.

 

그럼, 계속해서 다음 곡 간다~? 쉬지 말라고!! 가벼운 목소리가 마이크에서 앰프를 타고 회장을 휘저었다. 그리 넓지 않은 장내를 가득 채운 남녀는 손수 그 분위기에 몸을 맡기고 소리를 내질렀다. 카라마츠의 주저도 순간이었다. 불꽃같은 감정의 홍수. 카라마츠는 즐기기로 했다. 아마도 남아있던 청춘의 한 조각을.

곡은 연달아 세 곡이 이어졌다. 경쾌하고 흥겹고 짜릿한 곡 선정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곡이 끝나고 또 한 번 보컬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말이지, 무려! 우리 밴드의 신곡을 공개할 겁니다!! 오늘 공연의 마지막 무대야. 소개할까, 이번 신곡의 드럼, 귀염둥이 쥬시마츠! 피아노, 약삭빠른 토도마츠! 그리고 베이스는 나 카리스마 레전드 오소마츠! 보컬은 미스테리어스 쿨, 이치마츠!! 나 베이스 처음이니까 못해도 봐줘?

오소마츠라는 이름의 붉은 사내가 무대중앙의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한 발짝 물러섰다. 그 자리에 아까까지 오른 편에 서있던 이치마츠가 다가와 마이크를 잡았고 이치마츠가 서있던 오른편으로 이동한 오소마츠는 어디선가 베이스 기타를 하나 꺼내와 자세를 취했다. 이치마츠가 숨을 들이마시고, 장내의 소란스러움이 일순 가라앉았다. 무척이나 낮고 고운, 허스키 보이스가 카라마츠의 귀를 간질였다.

 

"알고 있겠지만, 나도 보컬은 처음이니까..."
"그래도, 기다리던 사람이 왔으니... 해보지 뭐."
"그러니까... 그러네. 곡명은 아직 없지만."

"잘 들어."

적막을 밟고 흘러나온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장내를 매웠다. 조용히 시작된 노래는 분명 카라마츠를 향해 있다는 걸, 오직 카라마츠만이 알 수 있었다. 부딪힌 시선은 카라마츠를 묶어 속박했다. 시선을 뗄 수조차 없이,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만을 보고 있었다.

잔잔한 드럼, 부드러운 피아노, 아스라한 베이스. 그리고 그 위의 너.

/우리들은 Timeflier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Climber
시간의 숨바꼭질 미아는 이제 싫어/

그건 어쩐지 추억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

"너 진짜 오늘 그 노래 부르려고?"
"공연할 생각은 없다더니?"
"우리가 졸라도 공연은 안 한다 그랬는데!"

공연이 있기 세 시간 전. 이치마츠는 밴드의 연습실에 도착하자마자 대뜸 자신의 단 하나뿐인 노래를 오늘 공연에서 부르겠다고 멤버 전원에게 말했다. 언젠가 모두에게 소개하고 합을 맞춰 연습해본 적은 있지만 무대에 설 일은 없을 거라 단언했던 곡이었다.

 

"그럼 하나 묻자, 무슨 심경의 변화로 무대 서겠다고 하는 거야?"
"맞아."
"그러게."

멤버들은 황당해하면서도 이유를 캐물었고 이치마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유를 말하지 않는 이상 완벽한 공연을 바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운명이 이제야 날 찾아와서."
"...하?"
"그런 걸로 해둬."

쥬시마츠와 토도마츠는 서로 눈을 굴리며 시선을 교환했지만 둘은 아무래도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오소마츠만큼은 어렴풋이 이치마츠의 말뜻을 알 것도 같았다. 밴드를 처음 결성한 그날. 이치마츠는 '그 사람'으로 있기 위해서 밴드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오소마츠는 겨우 이해했다. 이치마츠는 그 사람을 앞질러 지금 이 순간을 향해 달려온 거라고.

 

언젠가 술에 취해 잔뜩 꼬인 혀로 옛날 얘기를 풀어놓았던 적이 있었다. 뮤지컬을 보았다고 했다. 그것은 돈을 주고 관람하는 정식 무대도 아니었고, 그저 어느 고등학교의 연극부 공연일 뿐이었다 말했다. 그런데도 그 공연은 이치마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건 분명,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기다려왔던 거였어."

 

이치마츠는 그것을 운명이라 칭했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만 더 너로 있을게/

*

고등학교 때 까지만 해도 카라마츠는 빛나는 청춘을 구가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농구로 땀을 흘리고 연극부에서 연기에 온 정성을 쏟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의 모든 노력과 경험이 쌓인 마지막공연. 청춘의 하이라이트는 밴드부와 연극부의 합동 뮤지컬이었다. 카라마츠는 주연의 자리를 얻었고 밤낮으로 연습했다. 동작을 외우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기다려온 실전.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때마침 내린 소나기로 실내강당의 관객석에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많은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조금 불안해졌다.

 

...훌쩍.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 자신의 소리는 아니었다. 카라마츠는 소란스러움의 틈새에서 분명히 들려온 작은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두리번거리던 카라마츠는 그것이 자신의 마음의 소리였나, 고개를 기울여도 봤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이내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무대의 끄트머리. 천막의 구석에서 한 아이가 가만히 서서 오도가도 못 하고 울먹이고 있었다. 앞에는 날선 스태프와 배우들, 뒤에는 무수한 관객들. 카라마츠는 아이가 무엇에 겁먹었는지 알아채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괜찮니? 형이나 누나랑 떨어져버린 거야?"
"....."
"괜찮아, 형아 무서운 사람 아니야."
"이상한 아저씨..."
"이상, 한... 아저씨도 아니라구....? 형이나 누나와 떨어져버렸다면 찾는 걸 도와주겠다!"

 

무대의상을 미리 세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보기에는 조금 이상한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덮으며 카라마츠는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을 맞췄다. 일곱 여덟 살 쯤 되었을까. 울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퍽이나 대견했다. 최선의 방법은 방송부에 맡겨 미아방송을 내는 것이겠지만 공연이 코앞인 카라마츠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손이 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카라마츠가 어영부영하는 사이 공연시간은 다가왔고 카라마츠가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카라마츠는 무책임한 자신을 자책하며 접이식 의자와 음료수 캔을 들고 와 공연장의 카튼 뒤 구석에 의자를 설치해 아이를 앉혔다. 한 손에는 음료수 캔을 쥐어주고 공연무대를 구경하고 있으라 일렀다. 분명 더 좋은 방법이 수도 없이 많았겠지만 긴장과 초조함에 마음 한구석을 좀먹힌 카라마츠는 다른 방법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카라마츠의 마지막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스스로도 믿기 힘들 정도로 최고의 공연을 이루어낸 카라마츠는 구슬땀을 닦으며 뿌듯함을 곱씹었다. 그리고 웃으며 기쁨을 나누고 싶어 아이를 찾았지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건 빈 의자와 마시지 않은 음료수 캔 뿐. 후에 물으니 학생회에서 미아 신고를 듣고 찾아와 아이를 데려갔다고 했다. 카라마츠는 그렇게 작은 해프닝을 잊었다. 그 정도의 사소한 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아이에게 갖는 의미 또한 그러했을까.

*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 카라마츠. 나는 네 이름도 몰랐었지. 너도 내 이름조차 몰랐다는 걸 알아. 안 그래, 이상한 아저씨? 우린 서로 이름조차 몰랐었지. 하지만 그때 당신의 공연은 어린 내 삶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 화려한 의상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연기를 했지. 그건 마치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어. 멋있었다고, 나의 첫사랑이 되기 충분했던 사람아.

 

나는 지금 그때의 너로서 있으려고 해. 그때 네가 그러했듯 무대 위의 사람으로 있으려고 해. 그러면 너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항상 기다려 왔지. 이렇게 너에게 나의 무대를 보여주는 날만을. 고대해 왔어. 우리는 이렇게 긴 시간을 넘어서 다시 만났지. 지금의 너는 그때의 나야. 알아, 나는 알아. 어때, 나는 반짝반짝 빛나? 멋있어? 그때의, 당신 같아?

/내가 기뻐서 우는 건 슬퍼서 웃는 건 분명,
나의 마음이 나를 앞지른 거야./

자아, 이젠 네가 내게 반할 시간이야.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알기 전부터 운명이었던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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