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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알밍/변호사×범죄자] D-day

 

D-day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달빛만이 비쳐오는 길 위는 검었고, 깨끗했다. 하지만 한 여자의 비명 소리 뒤로, 제 손에서 떨어졌던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 뒤로, 사람들은, 풀숲 속에 숨어 저를 기다리던 하이에나들은, 한 마리의 사냥감이 맹수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구경하려고 몰려드는 것 마냥 개미떼처럼 그 좁은 골목길의 입구를 그 많은 발걸음으로 억지로 틀어막았다.

살, 살인. 사람이, 죽었....

웅웅거리는 소리는 정확한 한 문장이 되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소리치고 있는 것은 같았다. 방법은 다르더라도, 그들이, 곧 찢겨질,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에 채여 벌건 속살을 내어 보일 가여운 희생양의 비명을 어떻게든 듣고자한다는 목적은 모두 같았다.

살인자야.

살인자.

살인,

자.

살인자. 변호사 마츠노 이치마츠의 이름은 그 날 이후로 닦아낼 수도, 긁어낼 수도 없는 살인자라는 주홍빛 글씨가 되었다.

 

 


D+1

 

탁, 탁. 책상을 두드리는 볼펜소리가 신경을 건드린다. 무슨 일이 있었냐니까. 인상 더러워 보이는 형사는 당장에라도 저가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으면 너야말로 이 볼펜으로 찔러 죽이겠다는 듯이 그를 윽박질렀다. 하지만 그의 답은 한결같았다. 모릅니다. 왜 그 골목길에 간 거지? 말했잖습니까, 집 가던 길이었다고. 원래도 자주 가던 곳이었다고요. 왜 하필이면 그곳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을까, 엉? 제가 아나요. 쓰러져 있던 게 고양이라면 알지도 모르겠습니다만은.

 

 

건조하고 무의미한 단어의 조합들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온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책상 위에서 힘없이 바스라졌다. 살인자, 마츠노 이치마츠는 그 이후로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그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뭘 말하든, 이쪽에서 나오는 말들은 저들의 조리를 더욱 맛깔나게 만들어주는 향신료가 될 것이 뻔했으므로. 그 태도는 그를 상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다들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그를 회유했고, 협박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그가 범죄자들의 변호를 맡았을 때와도 같은 표정으로,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아무 흥미도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내곤 했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더라고. 그를 상대하고 나온 사람들이 말하는 일관된 설명이었다.

 

 

한편 사냥감의 정신은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온갖 매스컴에서 떠드는 변호사가 행한 살인은 사람들에게 제공된 좋은 요깃거리였다. 선을 행하는 자라 자신을 지칭하는 자들 중 하나가 범한 위법. 그들이 눌러 담고 있던 악의 발현인가? 변호사 협회의 앞으로의 대처는? 이라는 되도 않는 자극적인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마치 그가 살인범이라는 것이 확실시 된 양, 그의 모든 것을 다뤘다. 그의 사생활은 까발려지고, 그의 정신 상태라는 것은 전문가라 지칭하는 남자에 의해 쓰여지고 사람들에 의해 입 속을 굴러다녔다.
 

그는 본디 다른 이의 시선이 가시와 같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변호사가 되었느냐고 하면, 그 누구도 의문을 가진 그 문장을 풀어줄 수 없다. 그는 제 업을 할 때에는 누구보다 성실했고 그것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으리라는 것만이 그 정답 언저리쯤을 맴돌까 모르겠다만은. 그러나 지금 그가 쌓아올렸던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가시보다 더한 손가락질이 그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것이 죽음보다 더한 것에 직면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그를 조각조각 토막 내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었다.

 

 


D+4

 

당신의 변호를 맡게 된 마츠노 카라마츠입니다. ....오랜만이군, 이치마츠. 마츠노 이치마츠는 제 앞에 선 남자의 모습을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자네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건가. 그런 눈빛은 이미 자원했을 때부터 많이 받았다고, 응~? 넉살스러움 반, 씁쓸함 반의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옛’ 동기는 이치마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마츠노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범죄자로 몰리기 전까지도 그와 같은 곳에 속해있던 변호사였다. 낯을 가리는 이치마츠와는 달리 밝고 사교성도 좋아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치마츠 또한 카라마츠라는 사람만을 까칠하지만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니까, 사람을 쉽게 믿는 사람이니까.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 깨져버렸을 때 가장 미련 없이 돌아설 사람이라고도 생각해왔다. 하지만 오늘, 사냥감이 되어 심판만을 기다리는 가녀린 한 고양이에게, 그는 손을 내밀며 웃어주었다.

믿고 있노라고. 마츠노 카라마츠는, 마츠노 이치마츠라는 사람을 믿고 있다고.

 

 


사건은 늦은 밤, 11시 40분에서 12시 반경 사이에 일어났다. 그 시각 그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밤늦게 귀가하고 있었고, 늘 가던 고양이 골목에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곳에는 한 남자가 흉기에 찔려 쓰러져 있었고, 그 옆에 있던 칼이 너무나 익숙한 것이라 집어든 순간 다른 사람이 그들을 발견했다고- 이치마츠는 진술했다. 피해자는 낡아빠진 스웨터며 코트를 겹겹이 껴입고 있었고, 두꺼운 장갑까지 끼고 있었음에도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칼에 깊게 찔려 즉사한 상태였다. 검시 결과 칼에 묻어있던 지문은 이치마츠의 것 밖에 없었고, 피는 피해자의 것과 일치했다. 피해자는 노숙자 중 한명으로, 며칠 전부터 그 골목길을 얼쩡거리다가 밤늦게 누군가-현재 이치마츠로 추정되는 누군가-와 싸우는 소리까지도 들렸다는 골목길 옆집의 증언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면, 그것들은 전부 이치마츠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명백하게. 

 

 


D+5

 

서류를 넘겨다보는 카라마츠의 손짓은 진지했다. 딱딱하다기보다는 부드러운 편이었지만, 늘 보던 직급이 아닌 범죄자와 변호사라는 관계의 속에 놓이자 그를 대하는 방법이 꼬여버렸다. 처음 보는 모습, 그것도 믿음직한 모습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그것이 자신만을 구원하기 위한 모습이라는 생각에 괜시리 가슴 한 켠이 조여들어왔다. 이미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나버린 사고는 제  길을 잃고 제멋대로 흘러갔다. 자원했다는 그는는 정말로 옛정 때문일까, 라는 의문이 가장 먼저 제 머릿속으로 뛰쳐들어왔다. 아무도 이 가망없는 사건을 맡고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스스로 오기를 청했다고, 눈을 반짝이며,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혹시, 라는 갈대라도 잡는 심정은 부서진 지 오래지만, 그는 혹시, 라는 그 조각조각 흩뿌려진 그 마음을 다시금 조금씩 모아내고 있었다.  이루어질 리 없는 설익은 기대를 하며.

 

 

서류 검토를 끝낸 카라마츠는 멋부린 앞머리를 손으로 크게 한 번 쓸어냈다. 보기 좋게 굵은 눈썹을 한 번 찡긋 올리며, 그는 활짝 웃어보였다.

이치마츠.

확신의 가득 찬 어조로, 그는 이 판을 뒤엎을 거라 자신했다.

너는 그 날, 그 노숙자가 너를 찌르려 했다고 진술해야해. 

 

 


D+6

 

카라마츠의 대본은 간략히 이런 식이었다. 이치마츠는 매일 퇴근길에 그 골목길에 고양이밥을 주러 갔다. 그런데 어느날부턴지 그 노숙자가 나타나 이치마츠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때문에 말다툼도 잦았지만, 그는 고양이들을 매우 아꼈기 때문에 그곳을 찾아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늘 제 마음에 안드는 행동을 부러 한다고 생각한 노숙자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이치마츠의 뒤를 밟은 후 어느날 그의 집을 털었다. 그럼에도 발길이 줄지 않고 오히려 언성만 높아지게 되자, 그는 집을 털 때에 훔친 부엌칼로 이치마츠를 찌르려 했으나, 얼결에 그 칼을 잡게 된 이치마츠에 의해 자신이 찔려버렸다. 이치마츠에게 그 때의 기억이 없는 것은 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대한 극심한 공포와 충격 때문이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가고 난 후 그의 각본에 심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이 성공할지는 알지 못하지만, 카라마츠의 능숙한 언변에 제가 잘 맞추기만 한다면 못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카라마츠는 이 대본을 내어보이며, 대신 이치마츠, 만약 이 사건이 살인죄가 아닌 정당방위로, 우리의 의도대로 결정이 난다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않겠어? 라며 그답지 않은 긴장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애초 이치마츠에게는 선택권 따위는 없었고, 만약 있다 하더라도 그를 위해 지옥까지 찾아와준 이에게 무례를 범할 이유는 없었다. 이치마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자료들을 전해받았다. 카라마츠는 그다지도 감격한 모습으로 과장된 몸짓을 하며 기뻐했다.


..애초에, 거절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D+12

 

카라마츠는 그를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얻으러 뛰어다녔다고 한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데, 라며 입술을 깨물어보여도 카라마츠는 밝게 웃으며 저가 하고 싶은 거라 그런거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자료가 풍부해질수록 그들의 각본은 조금씩 견고해졌고, 날짜가 바뀔수록 이치마츠는 저의 역할에 점점 더 깊게 빠져들어갔다.

 

 

마침내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카라마츠의 부탁이 빛을 보게 될 날이 밝아왔다. 이치마츠는 잔뜩 주눅든 모습으로 가끔씩 몸을 떨었다. 연기가 아닌, 실제로 며칠 끼니를 먹지 못해 힘이 없어 나달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한 탓이었다.

 

 

재판장의 분위기는 엄숙했으나, 이치마츠는 그 와중에도 자신만만한 카라마츠의 모습에서 안식을 찾았다. 그는 이제 전적으로 카라마츠에게 모든 것을 기대고 있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배심원 여러분. 여기 이 두려움에 떠는 가여운 이를 보아주십시오. 생명의 위협까지도 받아오면서도 그 골목에 발길을 끊을 수 없던, 그 갸륵한 마음씨를 보아주십시오. 그를 찌르려한 이는 누구였을까요? 그는 빈집털이를 당했다는 신고까지도 한 적이 있으며, 발급해온 진단서의 내용을 보면 현재 그의 정신상태는 아주 불안정하고,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상태입니다. 일부 기억은 사라져버렸을 뿐더러, 최근 그의 정신은 그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가 자신에게로 오는 위협으로부터 그저 자신의 몸을 지키려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카라마츠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상대편의 검사는 카라마츠의 말이 끝난 후 몇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모든 것을 대답하고, 오히려 제게 이로운 쪽으로 끌어나가고 있었다. 의견 수정 없는 검사측의 발언이 끝나고, 배심원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모두 잘될거야, 그가 있으니, 모두 잘될거야...마음속으로 잘게 떨며 흘려낸 소망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인지, 카라마츠는 손을 뻗어 이치마츠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순간 배심원들의 의견이 최종 결론으로 도달했음을 알리고, 그들 중 한 명이 일어나 결과를 알리기 시작했다.

 

 

피고인, 마츠노 이치마츠는-

 

 


내가 말했잖나. 카라마츠의 달큰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이치마츠는 기적을 본 듯한 감각에 한동안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그리도 잡고 싶어했던, 갈대를 엮어 만든 줄은 견고했다.

 

 


D+23

 

재판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나고,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카라마츠의 소원은 이치마츠를 '얻는' 것이었다.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가벼운 처벌만을 받게 된 이치마츠는 그것마저도 그가 해준 것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운 소원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왜 하필 저를 갖고 싶은 것일까, 라며 덧없는 희망까지도 품어보았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매우 소중히 대했고, 정말로 자신의 소유인 것마냥 행동했다. 구원자가 저로 인해 만족을 얻고 행복해한다는데, 마다할 것은 없었다. 이치마츠는 변호사 일을 그만두었고, 카라마츠의 집에 살며 간단한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게 될거라 들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그의 자취방을 팔아버렸고, 카라마츠의 집으로 옮기는 그날을 기약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침내 그날은 찾아왔고, 이치마츠는 부푼 마음으로 이삿짐 차를 타고 그의 집에 도착해 미리 받은 고양이모양 고리가 달린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갔다. 그는 오늘 다른 일 때문에 조금 늦는다고 미리 통보받은 터라, 짐은 카라마츠가 오면 그의 도움을 받아 풀기로 결정하고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에 비해 넓은 집 안은 조금 쓸쓸해 보였고,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어두운 느낌도 들었다. 카라마츠의 집이다, 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그 특유의 밝음이 조금 결핍되어있었다.

 

 

온갖 안쓰러운 옷들이 쌓인 옷방이나, 지나치게 검소해보이는 부엌과 같은 여러 방들을 지나 오래된 책 향내와 새 책의 빳빳한 냄새가 한데 섞인 향이 군데군데 배어있는 책들이 가득 쌓인 서재로 들어가자, 카라마츠의 노트며 다이어리, 필기구가 책상 한가운데에 어지럽게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고급스러운 검은 가죽커버의 일기장. 멋스럽게 diary라 적힌 그 모습이 어쩐지 역시 그의 취향인 거 같다, 라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버렸다.

아주 가벼운 생각으로, 그의 하루 일과는 어떤지 알고 싶다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그는 그 일기장을 넘겨보았다. 그 얄량한 호기심이 자신을 무너뜨리리라는 것은 생각치도 못한 채로.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일기장이었다. 후루룩 넘겨보던 그의 손에 걸린 것은 보랏빛의 심플한 플래그. 그부분부터 펼쳐서 살펴보기 시작한 그의 눈에 띄인 것은 D-14라는 휘갈겨쓴 글씨였다.

나만의 아기고양이로 만들고싶다, 라는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여서, 아무도 그의 몸에 손끝하나 댈 수 없게 만들고싶다. 더 나아가서, 그가 나만 보도록 만들고 싶다.

 

 

몇날며칠을 그대를 보기만 하며 기다렸으나, 그대는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기에.

이 모든 건 당신을 손에 넣기 위해서.

꾹꾹 눌러쓴 글씨는 소름끼치도록 단정했다. 더이상 보면 안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것은, 아마, 그의 욕망 언저리쯤, 그의 가장 깊숙한 그곳에 있는 소원을 토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그가, 그토록 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이기적인 사람, 이라 욕해도, 그저 그는, 자신이 그토록 올곧게 바라보는 카라마츠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에 조금, 아주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기에, 그의 손가락이 가는 진로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꾸욱 깨문 채로 나머지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 밑에 있는 것은 꽤나 상세한 계획들이었다.

먼저, 그의 집으로 가서 흉기가 될만한 것을 훔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의 집의 위치. 위치를 알아낼 때에 되도록 행동반경도 조사하자. 최대한 많이 사용했을 법한 것을 몰래, 그가 빈집털이로 의심하도록, 아주 조용히 훔쳐낸다.

 

 

그 다음 갈 곳 없는 노숙자를 꼬드겨 독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하며 유인한다. 혹은 돈으로 매수한다.

 

 

각 문단에는 굵은 글씨로 각각 D-12, D-9 완료, 라고 적혀 있었다. 이치마츠는 읽던 도중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이게 카라마츠가 쓴 거라고? 온갖 불법과 악행들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장은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아무런 감정도 담고있지 않았다.

 

 

몇 차례 그를 방문하다가 시비를 걸고, 싸우다가 못이기는 척 물러난다. 최대한 시끄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의문을 가짐에도 쉽사리 그의 일기장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이치마츠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음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그곳에 쓰여있는 것은, 가히 놀라울 정도의 것이어서,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굳어 서있었다.

그 다음날, 그를 살해한다. 이치마츠가 지나가기 직전에. 최대한 빨리 그를 죽이고 자리를 뜬다.

 

 

이치마츠.

 

 

자신의, 이름.

 

 

이치마츠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 부분을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나를 위해서? ...아니, 나, 때문에. 진득한 죄악감과 공포심이 일기장을 쥐고 있는 손가락을 타고들어와 온몸을 헤엄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카라마츠가 계획한 것이라고? 설마,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며 바로 다음장을 쓸어 넘겼다. 얇은 일기장이 뭉텅이로 잡혀 넘어가며 D-day라는 선명한 글자가 제 몸체를 뽐내며 나타났다.

 

 

성공했다. 칼을 잡은 것에 대한 여운 때문인지 아직도 손에 그 감촉이 남아있는 것 같다. 노숙자는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죽어, 이대로면 그가 오지 않겠지 싶어 작게 앓는 소리를 내보자, 그는 바로 발걸음을 돌려 이곳을 향했다. 아아, 내 계획이 해피엔딩을 맞는 순간.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나는 지금 그가 다가올 때에 미리 봐둔 길쪽으로 나와 집에 돌아왔다. 손이 약간 떨린다. 흥분과 기쁨 때문이리라. 오늘은 축배를 들어야겠군. 하지만 아직까지는 정신을 차려야한다. 그의 변호는, 내가 맡아야하니까.

 

 

덜덜 떨리는 손가락 탓에 종이가 팔랑 넘어가자 보이는 번호는 D+4였다.

이치마츠는 조금 초췌해보였다. 아아, 안쓰러운 나의 사랑.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을 그곳에 가둔 것일 테지. 그는 내가 변호를 맡게 됐다고 하자 기쁜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작이 좋다. 이제부터 그는 조금씩, 내게로 넘어오게된다. 나는 증명해보일 수 있다.

사랑하는 나의, 고양이.

왈칵,하고 토기가 치미는 것을 겨우겨우 참으며, 그는 심하게 떨려오는 손 탓에 떨어뜨린 일기장을 차마 주워 볼 생각마저도 하지 못한 채로 그것이 마치 귀신에 씌인 물건이라도 되는 양 공포심을 두 눈 가득 담고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관찰했다. 자신의 흔적에 집착했다. 그래서 칼을 훔치고, 노숙자를 죽였다. 그리고 그걸 저에게 뒤집어씌우고는, 그, 가증스러운 얼굴에 수려한 미소를 띠우며 제게 안심하라 속삭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죗값을 저에게 청구하며, 자신에게 오라고, 그렇게 말했다. 바보같은 저는, 깊게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로, 그가 내민 피투성이의 손을 덥썩 잡아버렸다. 미련하게도, 그는 곧, 잡아먹히리라.

이치마츠는 굳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뒤에서 문이 열리고, 슬리퍼를 신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빨리, 치워야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머릿속을 지우고 그를 보며 웃어야하는데. 하지만 덜덜 떨리는 몸은 그것을 거부했다. 카라마츠가 가까이 오는 것이 느껴지고, 작게 바람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봤군.

소름끼치도록 낮은 목소리에, 이치마츠의 어깨가 튀어올랐다. 삐꺽거리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바라본 카라마츠는,
환한 웃음을 얼굴 가득 끼얹고 있었다.

아.

미련한 고양이는 가까이 다가오는 맹수에게 발톱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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