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eeling Good -자몽
한 눈에 봐도 사치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울 따름인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나 넓고 밝은 공간에 사람 한 명 없이 고요하다는 점이 되려 괴기스럽다. 환한 전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이 조용한 공간에 구두굽을 울리며, 이치마츠는 로비에 들어섰다.
텅 빈 로비를 가로지르며, 이치마츠는 로비 바닥에 카펫이라도 깔라고 건물주에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발굽 소리 같은 구두소리가 영 거슬렸다. 카펫이면, 제 집에 있는 동물친구들의 털처럼, 푹신하고 부드러워서 걸을 때 소리도 안 나고 발걸음은 편할 테고 일석이조가 아닌가. 물론 이 웬만한 건물의 두 배나 되는 넓디 넓은 1층 로비의 바닥재를 바꾸는 시공을 하려면 한 동안 호텔 운영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당장 시공비로 상당히 금전적으로 아플 것이다. 하지만 이치마츠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돈을 내는 사람은 건물주지 이치마츠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지금 이치마츠가 트집을 잡으며 그 위를 걷고 있는 바닥재는 바로 한달 전에 막 공사를 끝낸 신설이었다. 이전에는 연한 검은색에 하얀색으로 무늬가 박혀 무광(無光)으로 은은히 빛나는 대리석을 깔아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던 바닥이었는데, 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누군가 건의하여 지금의 것으로 바꾼 것이었다. 불만을 건의한 사람은 이치마츠였다. 건물주는 이치마츠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어, 짧지 않은 공사기간을 거쳐 지금의 연한 주황색의 에폭시 바닥이 되었다. 건물주에게 얼추 마음에 드는 색과 어떤 느낌을 원하는지 말만하면, 건물주는 최대한 이치마츠의 의견을 수용하여 바닥을 새로 장만했다. 저번 검정 대리석은 꽤 마음에 들었었으나 이치마츠가 주로 입는 하얀 슈트와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어 바꾸라고 했다. 대리석 이전에는 아마 진한 보라색의 타일이었을 것이다. 저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라는 소리를 들어 바꾸라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나마 남아있다. 그 이전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 호텔의 로비 바닥이 바뀐 것은 이제 손으로 꼽지 못할 정도로 번번히 일어났다. 전부, 이유는 이치마츠의 바꾸라는 말 때문이었다.
이번 주황색은 실패했다. 꽤나 특이하게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는 가장 친한 친구의 털 색과 같은 색을 주문했던 것이었는데 생각했던 것 이하로 참 별로였다. 듣기로는 건물주가 새로 시공을 끝마친 지 두 달 만에 또 바닥을, 그것도 주황색으로 바꾸려 하자 호텔의 임원들이 말렸다던데, 매번 바꿀 때마다 건물주는 임원들과 부딪힌다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이치마츠와는 상관 없는 문제였다. 바꾸란다고 매번 곧이 곧 대로 바꾸는 건물주의 책임일 뿐, 매번 임원들에게 불만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항상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건물주였으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면전에 대고 폭언을 부은 뒤 때려 치고 나가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지. 제정신이 아니긴 하지. 팔을 들어 머리 위에 쓰고 있던 페도라를 푹 눌러쓰는 입가에 엷은 조소가 섞였다. 확실히 호텔에 주황색은 아니다. 촌스러워. 그리 생각하며 이치마츠는 제 뒤를 따르는 수행들과 함께 미리 문이 열려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번에 바꾸라고 할 카펫의 색은 저번에 선물 받은 고급 와인이 떠올라 검붉은 색으로 하기로 마음 먹었다. ‘시가.’하고 짧게 말하자 곧이어 뒤에서 작은 소리가 나더니 입 가까이로 불이 붙은 시가가 내밀어졌다. 이치마츠는 살짝 입을 벌려 알아서 입으로 들어오는 시가를 물었다. 호텔은 도시 내 최고의 고층건물로 유명세를 날리는 건물이었다. 간혹 일반 시민들이나 여행객들이 호텔의 최고층에 호기심을 품는다는 얘기가 들렸다. 이치마츠는 할 수만 있다면 제 심심풀이 겸 자비를 베푼다는 마음으로 최상층의 사진을 찍어 온라인 상으로 유포해버리고 싶었다. 일반인은 고사하고 웬만하면 세상이 다 아는 유명인사조차 허락되지 않는 층이었다.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감속하며 이내 문이 열렸다. 이치마츠에게는 하도 와서 지겨운 이 최고층은 여러 가지 이유로 빗장을 걸어 잠그고 세상에 공개를 금하고 있었다. 호텔 건물주의 자택이기도 하고, 또 이 층이 주로 사용되는 용도의 보안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겨 어두운 남색 일색인 두꺼운 문 앞에 섰다. 알아서 열리는 문 사이로 가운데가 뚫려있는, 크고 길다란 원형의 테이블이 보였다.
“어서 와, 돈.”
그리고 기꺼이 문 앞에서 저를 맞아주는 남자도.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이 층만큼이나 지겨운 얼굴이었다.
“돈이라고 부르지마.”
이젠 패밀리의 일원도 아닌 주제에 그는 여전히 이치마츠만 보면 그 호칭으로 불렀다. 아. 미안하군. 이제는 고정 레퍼토리가 되어버린, 시정할 생각이 하나도 없는 사과를 흘려 들으며 이치마츠는 남자를 밀치고 지나쳤다. 단숨에 불쾌해진 기분을 서슴없이 드러내 보이며 내키는 대로 빈 자리에 털썩 앉았다. 제 얼굴로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들에 비위가 사나워졌다.
“토도마츠. 내가 저 자식 나오는 자리엔 안 나간다고 했잖아.”
“엣, 읏, 돈……”
제법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뒤에 서있던 토도마츠가 난감해하는 게 느껴졌다. 이치마츠도 스스로가 지금 토도마츠에게 괜한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불참할 수 없는 자리였고, 그것은 이치마츠에게 뿐만 아니라 이치마츠의 바로 맞은 편 자리에 앉아 계속해서 저를 쳐다보며 웃는 면상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마주치지 않을 수가 없는 사이였다. 그걸 알면서도 항상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이치마츠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비단 과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슬쩍 둘러본 회장에는 올 사람은 다 와있었다. 매번 보는 얼굴들인지라 이제는 지겨울 따름인 얼굴 중 몇몇은 딱딱한 무표정이거나 혹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었다. 지각한 주제에 말이 많군. 한 번을 제 시간에 오지 않아. 또 몇몇은 험악한 얼굴로 이치마츠에게 무어라 비난과 불평을 내뱉었다. 그런 몇몇에게 마찬가지로 눈을 흘기며 이치마츠는 짜증스레 혀를 찼다.
“닥쳐 영감탱이들.”
회의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매번 당당하게 늦게 오는 이치마츠 때문에 시간을 늦춘 것인지 회의 내용은 이제 막 시작 된 것이었고 이치마츠는 그걸 보며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종료시간에 벌써부터 지루해졌다. 단순히 지루하기만 한 것이라면 회의 단골로 등장하는 협상과 거래에 끼어들어 재미라도 봤을 테지만, 다른 패밀리로부터 많은 원성을 사곤 했던 그 심심풀이 장난은 몇 년 전부터 중단되었다. 회의 내내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 맞은 편 자리 때문이었다. 짜증나는 자식. 그는 턱을 괴고는 대놓고 제게로 얼굴을 고정시켰다. 그의 양 옆에 앉은 다른 사람들이 가끔 그를 힐끔거리며 얼굴을 구기거나 미쳤다고 중얼거리는 건 제법 우스웠지만, 뚫어져라 저를 바라보는 시선하며 한 시도 내려가지 않는 그 입꼬리가 자꾸만 시야에 잡혀 거슬렸다.
“돈, 이거야.”
제 귀에 대고 속삭이는 토도마츠의 목소리에, 이치마츠는 고개를 돌려 이번 회의의 진행을 맡은 어느 조직원을 바라보았다. 딴 생각을 하느라 듣지 않았지만, 관련된 두 조직간에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주제는 미루고 새로운 안건으로 넘긴 모양이었다. 이치마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토도마츠에게 답했다. 집중을 하고 보니 제법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이번 안건의 주 내용이 들렸다.
“이 도시의 새로운 카지노 설립에 관한 겁니다.”
장내 분위기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도박을 다루는 카지노만큼 돈이 술술 들어오는 사업은 없었다. 모두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마냥 조용히 눈을 빛냈다. 바뀐 분위기에 사회자를 맡은 조직원이 조용히 꿀꺽 침을 삼키는 게 보였다.
“이건 우리가 가져가지.”
그런 고로 꼭 채와야 하는 거라고, 호텔에 들기 전 차내에서 토도마츠에게 들들 볶여가며 들었던 것이다. 새로운 사업에 손을 대는 건 언제나 귀찮은 일이지만 항상 현재와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지 모르기에 변화해야만 했다. 이미 이치마츠 패밀리의 아래에만 카지노가 세 채지만, 이 참에 신설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이치마츠는 생각했다. 마침 곧 있으면 일어날 작은 소동 때문에 금고도 가벼워질 테고, 이치마츠 역시 여러모로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최근 들어 패밀리는 손실만 여러 번을 본 주제에 손실분을 메우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보유 자금의 하한선을 높게 잡아 놓는 토도마츠의 눈에 돈독이 오를 정도니 패밀리의 자금 현황은 그리 양호한 상태가 아니었다.
잠시 입에서 시가를 떼내고 천천히 숨을 흘려 보냈다. 하얀 연기가 눈 앞에 자욱하다가도 금새 말끔히 가셨다. 그리고 나타난 건 냉랭한 얼굴들이었다. 버릇 없는 도둑고양이라고 부르는 것 에서부터 이치마츠에게 넘기는 것만큼은 절대로 반대한다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불만의 소리와 함께 얼굴이 뚫릴 것마냥 박히는 매서운 눈초리들에 이치마츠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응수했다.
“오늘 내일 하는 어르신들보다야 아직 창창한 내가 운영하는 게 더 안정적이고 좋을 거 아냐.”
예상은 했지만 이치마츠의 발언은 그저 불 붙은 데 기름을 부은 효과를 일으켰다. 토도마츠가 작게 이치마츠를 나무랐지만 열이 뻗친 몇 명이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이치마츠의 귀에 닿지 않았다.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두 사람에게 눈을 흘기며 이치마츠는 입에 문 시가를 흔들어 댔다. 고막을 불유쾌하게 건드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귀를 막는 시늉을 하자 오히려 볼륨만 키운 꼴이 되었다. 어쩌다가 제 뒤의 토도마츠와 눈을 마주치자, ‘거봐’ 라는 식의 언짢은 눈초리가 무언으로 저를 질타하기에 이치마츠는 ‘켁.’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며 이를 갈았다. 침까지 튀기며 저에 대한 비난으로 열변을 토하는 두 사람은, 오늘 회의 이전에 이치마츠에게 당한 것이 있는 탓에 저리도 거칠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돈줄이 되는 의약산업에 투자를 하고 있기에 우리 패밀리도 돈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훼방을 놓았고, 다른 쪽은 새로운 건축사업을 벌이려 하기에 사업 내용이 마음에 들어 그 건을 채갔다. 그런 식으로 밥그릇을 뺏고 빼앗기는 일이야 이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니 뺏긴 두 사람이 열 받아 하고 말 것으로 끝나면 이치마츠의 행동 자체는 문제될 게 없었다. 문제는, 그 뒤 마치 조롱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내진 선물이었다.
선물의 내용물은 와인이었다. 병에 담긴 것만 한 상자, 오크 배럴만 두 개를 받았기에 너무 많아 처분하기 번거로웠던 참에, 관대한 마음으로 선물 겸 사과의 성의로 이치마츠는 두 사람에게 각각 한 통씩의 배럴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이 예상 외의 복병이 되어버린 것이다. 듣기로는 2주 간은 허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만 누워서 생활했다고. 어째서 받은 선물을 또 남에게 선물로 줬느냐며, 하다못해 내용물을 확인이라도 하지 그랬냐며 저를 다그치는 토도마츠의 성화에 못 이겨 이치마츠는 또 다시 사과의 의미로 선물을 보내야만 했다. 이런 데에는 무지하다고 투덜거리며 고심고심 한 끝에 이번에는 질 좋은 상등의 송아지를 보냈다.
“그러고 보니 송아지, 맛있게들 드셨나? 새끼긴 해도 잡으려면 번거로웠을 텐데.”
살아 있는 송아지만 덜렁 보내버려서, 앞으로 두 사람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발목을 잡을 거라고 울며 걱정하는 토도마츠를 달래기란 꽤나 힘들었다.
송아지 이야기에 한 명은 뒷목을 잡고 다른 한 명은 열 받아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겁먹은 송아지가 저택 안을 마구 날뛰며 돌아다녔다고 했다. 난장판이 되어버렸을 내부를 상상하면 우스울 정도로 기분이 유쾌해졌다. 웃기긴 웃기잖아. 같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토도마츠는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선 손톱을 물어뜯으며 온갖 앞날을 다 걱정했다. 토도마츠가 말하는 비관적인 이야기에 뭐 그리 사서 걱정을 하냐며 한 귀로 듣고 흘리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걸림돌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귀찮아 죽겠네. 누구는 와인에 그런 성분이 들어가 있는 줄 알았냔 말야. 송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어느 부위를 좋아할 지 몰라서 그냥 통째로 준 거야, 그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했더니만 체면이 말이 아니게 토도마츠에게서 면박을 받았었다.
다른 조직들은 재빨리 이치마츠가 선점을 고한 것에서부터 이미 일찌감치 포기했는지 얌전했다. 그렇다면 저기 저 썩기 직전의 토마토 같이 익어버린 두 사람만이 반대라는 건데. 사회를 맡은 조직원은 어찌할 줄 모르고 쩔쩔 매고 있고 다른 조직들도 불똥 튀는 게 싫은지 가만히 있거나 혹은 재미있는 구경이라는 식으로 이쪽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치마츠 역시 그래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들어주고 있었으나, 바로 제 앞의 책상에까지 침을 튀겨가며 몇 번이고 책상을 쾅쾅 내리치는 통에, 더럽고 시끄러워서 점차 신경이 예민해지고 인내심이 메말라갔다. 기어코 두 사람이 전대 보스의 이야기를 꺼냈다. 머리로 열이 뻗친 이치마츠는 시가를 문 턱에 힘을 주고,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호통을 칠 생각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때문에 이치마츠는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뒤늦게 쥬시마츠의 손이 어깨에 올라와서야 이치마츠는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었다. 시뻘겋게 달아올라 뭉툭한 이와 두툼한 혀를 내보이던 두 사람에게서 고개를 꺾고 제 정면을 향하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저 눈에 익은 진득한 웃음이 볼 때마다 짜증나는 거였다. 여유롭게 양 입꼬리를 올린 남자가 점잖게 손을 들고 있었다.
“이야기 중에 미안하지만,”
이치마츠의 시선이 저희들에게 향하지 않자, 함께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졌던 두 사람도,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제게 모인 시선들이 만족스러운지 그는 입으로 호를 그린 채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
“이 건은 내게 넘겨줬으면 한다.”
저 웃는 얼굴에 물 한번만 끼얹어보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Sei pazzo?”
“하하, 전혀. 제정신이다.”
이탈리아어를 알아들은 몇몇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남자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구겨진 얼굴의 이치마츠에게 화답했다. 방금 전까지 이치마츠에게 일갈을 날리던 두 사람은 황당한지 그대로 굳어버렸고 다른 사람들은 새로이 전개되는 양상에 흥미진진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갑작스레 끼어든 남자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매우 익숙한 기시감을 느끼며 혀를 찼다. 지루한 회의 속 이치마츠의 낙(樂)과도 같은 협상주도는 항상 이런 식으로, 남자의 난입으로 종료되었다. 이치마츠와 거래를 원하는 이들이 나타나면, 남자는 항상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 거래를 파기시켰고, 이치마츠가 거래할 용의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알아채고는 다른 어느 조직보다도 빠르게 접선해와선 의심스러울 정도로 좋은 제안을 하곤 했다. 아무리 앞뒤를 따져도 이 이상 더 좋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남자와의 거래를 성사시키면 항상 쏠쏠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남자의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똑같이 되풀이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속담처럼, 두 눈 멀쩡히 뜨고도 이치마츠는 남자를 막을 수 없었다. 크고 작은 조직들이 섞여 안정적이었던 거래의 지분은 점차 남자에게로 몰려, 어느새 패밀리가 성사시킨 거래의 절반에 달하는 분이 남자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약소조직이 큰 조직에게 붙어 먹는 경우도 아니고, 오히려 크기를 따지자면 남자의 조직은 이치마츠의 패밀리 발끝에도 못 미쳤다. 신생조직으로 등장한 지 몇 년 만에 남자의 패밀리는 어느덧, 이렇게 도시의 내로라 하는 인물들과 같은 장소에 모일 만큼 성장했지만 그렇기에 기존의 여타조직보다 아직 규모가 작았다.
남자는 곧 유려한 말솜씨로 제게 카지노 설립 건을 넘길 것을 종용했다. 말은 쉬웠다. 신생치고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확실히 이 곳에 모인 사람들 중 남자의 세력이 제일 작았다. 그러니, 쉽게 말하자면, 그런 작고 약한 저에게 카지노라는 강력한 자금 줄 하나를 허락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여기가 무슨 자리인데 그런 식으로 동정을 구하는 거지? 그런 이치마츠의 생각과 달리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우호적이었다. 원래도 강대한 이치마츠의 패밀리에 넘겨줄 바에야 남자에게 넘겨주는 게 뒤탈이 없다고 보는 것 같았다. 그거야 말로 오산이 아닌가. 요 몇 년 새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성장한 것이 남자의 세력이거늘.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남자에게로 넘어간 듯 보였다. 단순히 세력 균형 유지를 위한 명목만은 아닐 것으로 생각되었다. 분명, 오늘 이 자리 이전에 남자는 이 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무언가 거래를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세력은 작을 지 몰라도 그 결과물만큼은 타 조직을 가뿐히 뛰어넘는 남자이다 보니, 남자에게서 모종의 득을 본 것이 틀림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평화적으로 카지노 설립 권한이 넘어갈 수 는 없었다. 이치마츠는 잠자코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았다. 뒤에서 토도마츠가 입술을 깨무는 것 같았지만 이치마츠라고 어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흘러가는 흐름이라면 그저 순응하는 수 밖에는. 속에서 짜증이 불쑥 치솟았지만, 이치마츠는 그저 조용히, 숨을 죽이고 남자를 눈에 담을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우스운 것은 남자 역시 계속해서 이치마츠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 쵸로마츠. 이 건은 이걸로 끝이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줘.”
어느 조직의 조직원인가 했더니. 이치마츠는 가볍게 혀를 차며, 그 조직원에게로 눈을 흘겼다. 이치마츠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이런 자리까지 끌고 나온 걸 보니 꽤나 총애하는 듯 했다.
“마츠노는 탐탁지 않은가 보군. 얼굴 표정이 좋지 않아.”
이치마츠에게 이를 갈던 두 명 중 하나가 그리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저에게로 쏠려 이치마츠는 불쾌함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거 작은 조직 하나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마츠노 패밀리에는 그런 관대함 같은 건 없는 건가?”
“무슨 헛소리야. 넓은 관대함으로 가만히 있어줬잖아.”
“그렇다고 하기엔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걱정되잖나.”
“Dio mio! 쓸데없는 걱정이군. 당신의 가냘픈 허리나 걱정하시지.”
또다시 얼굴이 시뻘개진 상대방을 입 닥치게 함으로써 달콤한 승리의 맛을 보는 것도 잠시였다. 이치마츠의 입가는 잠깐의 승리를 맛보고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고 대신 미간이 구겨졌다. 가만히 있던 다른 한 쪽이 비꼬는 듯한 웃음을 걸치며 입을 여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입에서 나올 소리가 좋지 않을 거라는 건 명확했다.
“아니면 뭔가. 아직도 배신당한 전적 때문에 그리 반응하는 건가? 치졸하군.”
역시 예상대로. 이번엔 이치마츠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이치마츠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늙은 수캐의 처진 입가마냥 입술에 호선을 그렸다.
“호오, 천하의 마츠노가 여전히 카라마츠를 불편해 한단 말인가?”
“뭐 뼈아플 수 밖에.”
“하긴 그렇겠군.”
“그렇게나 아끼던 충견에게 물렸으니 충격이 어련하겠나.”
“지금 당장 그 나불대는 입으로 내 걸 빨고 싶지 않다면, 닥치는 게 좋겠어.”
어느새 총을 꺼내었는지 이치마츠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치곤 총구로 가볍게 입에 문 시가의 끝을 톡톡 치고 있었다. 뼈가 툭 불거져 있는 이치마츠의 하얀 마른 손 안에서, 검은색의 44구경 리볼버가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순식간에 장내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다른 조직의 사람들이 총을 꺼내려 손을 옮겼을 때는, 이미 토도마츠는 그가 애용하는 38구경 베레타의 안전방아쇠를 내린 채 대기하고 있었고 쥬시마츠로 말할 것 같으면 과시하듯이 양 손에 기관권총을 든 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몇몇 사람들이 소리 없이 침을 삼켰고, 수 많은 눈동자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조직의 수장인 몇몇만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칠 뿐 가만히 있었고 다른 대부분은 죽은 듯이 숨을 죽였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의 연속, 이치마츠는 한 쪽 눈만 찌푸리며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어 삐죽거렸다. 눈에 익은 저 웃음이 너무도 꼴 보기 싫었다.
“자자. 그만. 젠틀맨? 마이 스위트 홈이 바로 옆이라고? 싸움은 밖에 나가서 해줘.”
끊길 것처럼 팽팽했던 공기의 흐름이 맥 없이 풀려버렸다. 남자는- 카라마츠는 예의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우리가 한 두 번 볼 사이도 아니고, 서로 예의를 지켜주지 않겠나? 특히, 거친 말은 삼가 해주시게.”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제게로 돌아오는 시선을 맞받아치며 제 발언의 어디가 거칠다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이치마츠는 부러 얌전히 총을 집어 넣었다. 이치마츠가 정장의 구김을 투덜대는 사이 숨 죽이며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한시름 놓으며 긴장을 풀었다. 이치마츠를 조롱하던 두 사람은 아직도 사색이 된 얼굴로 조용히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 흠뻑 젖어 식은땀이 구레나룻 옆으로 흐르는 걸 보며 이치마츠는 눈을 가늘게 휘었다. 아무리 득달같이 물어뜯으려 해도 아직까지 제 패밀리의 영향력은 공고하다는 걸, 이런 식으로나마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꽤나 번거로웠다. 아직 너희 정도는 가뿐하단 말이지. 은연 중에 그런 식으로 위협을 하면 대체로 다른 조직들 역시 얌전히 순종했다. 이 자리에 모인 인간들 중 대부분이 그런 식이었다.
딱 한 명. 카라마츠를 제외하고.
“늦게나마 사과하지.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하군, 이치마츠. 너무 상심치 말았으면 좋겠어. 선심 써서 양보한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는데.”
“이름 부르지마.”
언제나 올곧게 저를 향하는 시선에서 눈을 돌리며 이치마츠는 고개를 돌렸다. 입에 문 시가가 유독 텁텁하게 느껴졌다. 연기를 슬슬 흘리며 이치마츠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됐어. 어디 자라나는 새싹 님이라는데, 어디까지 버틸지 구경해주지.”
짜증스럽게 뱉자 카라마츠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넓은 아량에 감사를 표하지.”
저 빌어먹을 말투는 하나도 안 변했다. 이치마츠는 들으라는 식으로 크게 코웃음을 치고는 완전히 흥미를 잃은 냥 의자에 늘어뜨린 몸을 틀었다. 카라마츠가 ‘쵸로마츠’ 하고 호명하니 당황했으나 곧 침착해진 목소리가 다시 흐름을 이끌어나갔다. 총기를 집어넣은 토도마츠가 이치마츠를 대신해 회의 내용에 집중했고 쥬시마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 곳에 들어온 이래로 취하고 있던 열중쉬어 자세를 한 채 언제나와 같은 얼굴을 했다. 급속도로 지루해지는 탓에 페도라를 눌러쓰고 잠들까 하니 자꾸만 거슬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간간히 제 눈치를 보는 듯한 낌새가 보여 그 쪽으로 눈을 향하면,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바보들이었다. 아무리 이치마츠의 조직이 정상의 자리에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 도시의 내로라하는 조직이 모인 곳에서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일 리 없었다. 애당초 모든 조직을 적으로 돌려 상대할 수 있는 능력도 안될뿐더러 이치마츠는 한 순간의 분노에 휩쓸려 그런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할 정도로 사리분별도 못하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두 명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마냥 거짓은 아니고 꽤 아픈 이야기는 맞아서 이치마츠는 그 둘을 진득하니 째려보다가 제풀에 지쳐 눈꺼풀을 닫았다. 자지 말라고 작게 속삭이는 토도마츠의 목소리가 들려, 내가 졸린 게 아니라 여기가 지루한 거라고 반박을 했지만 깨닫고 보니 저 혼자 속으로 한 말이었다. 입에 문 시가마저도 귀찮아졌다. 졸리다기보다는 흥미가 떨어졌고 심심하다기보다는 그저 조금 풀이 죽은 것이다. 이치마츠는 전신에 도는 무기력을 떨치기 위해 제 귀로 들려오는, 쵸로마츠라고 불린 조직원의 목소리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다가도 결국 포기하고 귀마저도 닫았다. 솔직해지자면, 뼈아픈 건 사실이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아닌 척하면서도 애정을 쏟았다. 그에게 최고의 전문가들을 붙여주고 제가 직접 가르치기까지 했다. 그를 주운 건 단순한 우연이었을 지라도 그 뒤에는 없던 애정까지 퍼부으며 아꼈다. 저와는 근본부터가 다른 듯한 그가 성장해 나가는 것을 뿌듯해하며 지켜보았고 언더보스가 부재 중인 조직에서 저와 함께 조직을 이끌어 나가주길 바랐다. 그랬는데. 그 모든 기대를 끊어버리고 박살내고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곁을 떠났다.
아이러니한 건, 그의 배신이 확실히 아팠을 지는 몰라도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치마츠는 사실…
“어라~ 자는 거야? 이치마츠.”
가까이로 다가온 기척에 반응하며 이치마츠는 슬쩍 감고 있던 눈 한 쪽을 떴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부터 짐작은 됐지만 막상 눈 앞에 두고 있자니 이치마츠는 벌써부터 성가셔졌다.
“뭐야 오소마츠.”
“아니 아직도 배신당한 상처가 쓰라린가 해서~ 내가 위로해줄까 하고?”
“꺼져.”
이치마츠는 잔뜩 얼굴을 구기곤 다시 눈을 감고 더욱 고개를 돌렸다. 오소마츠는 이치마츠와 제법 합이 잘 맞는 상대이나 아무리 그래도 이치마츠에게 있어 그는 ‘마음이 잘 맞는 비즈니스 파트너’보다는 ‘성가신 존재’ 임이 더 들어맞았다. 제 옆 자리로 아예 자리를 옮겨와 앉은 오소마츠 때문에 불편한 심기가 이치마츠의 안을 가득 메꾸었다. 오소마츠는 저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자못 불편한 기색만 풀풀 내뿜는 이치마츠를 면전에 두고도 아랑곳 않고 시시덕거렸다.
“그치만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잖아. 2년 전이던가? 3년 전?”
“4년 전임다!”
“오 고마워 쥬시마츠 군.”
고맙단 인사에 하핫! 웃는 쥬시마츠의 웃음소리에 아연한 표정이 지어지는 것도 이골이 난지 오래였다. 뭐 하러 대답이나 해주고 있는 거냐고. 하지만 아무리 째려보아도 쥬시마츠는 언제나의 표정으로 덤덤히 이치마츠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쥬시마츠가 토도마츠도 아니고 고작 제 시선 따위에 움츠러들지 않는 다는 걸 알기에 이치마츠는 짧게 혀를 차고는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오소마츠와 쥬시마츠는 비교적 최근 쥬시마츠의 손 안으로 들어간 새로운 총기에 관해 이야기 꽃을 피웠다. 토도마츠는 카지노를 놓친 것이 아까운지 말 거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회의에 집중하고 있었고 쥬시마츠와 오소마츠는 이제 이치마츠는 안중에도 없이 서로 덕담을 던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꽃피웠다. 이치마츠는 이 상황과 분위기에 싫증을 느끼며 시가만 뻑뻑 피워대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쵸로마츠란 조직원의 목소리가 희미했다. 쵸로마츠, 그 이름을 부르던 때의 카라마츠가 문득 떠올랐다. 이치마츠는 시가를 문 턱에서 힘을 뺐다. 이 자리에 데려올 정도의 존재임에도 이치마츠는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무엇에 탁월하기에 사실상 카라마츠의 비서 노릇을 하고 있는 거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느슨해진 턱 관절로 인해 자연스레 시가가 아래로 쳐졌다. 무게 때문에 자연스레 내려가는 시가의 움직임을 느끼다가 적절한 선에서 다시 제대로 물었다.
틀렸어 쥬시마츠. 정확히 말하자면 5년 전이야. 정정해주는 말이 목구멍 속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이치마츠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이치마츠는 사실 알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저를 배신할 것이라는 걸.
5년 전, 야심한 시각이었다. 카라마츠는 그 날의 임무를 마치고 이치마츠의 방을 찾아왔다. 이치마츠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지정석이나 다름 없는 소파에 누워 조금씩 찾아 드는 수마를 느끼고 있었을 때, 허락을 구하는 낮은 노크 소리가 조용한 실내를 울렸다. 금방이라도 끊길 것만 같은 목소리로 방의 출입을 허락하자 조금의 텀을 두고 문이 열리며 카라마츠가 들어왔다. 제가 누워있는 소파의 앞으로 카라마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때까지도 이치마츠는 눈꺼풀에 드리운 수마를 내치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청각에 의존해 카라마츠의 움직임을 인지했다. 그치고는 굉장히 조용한 출입이었던 터라 이치마츠는 작은 호기심을 가지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경직된 듯 몸을 굳히고 서 있는 카라마츠가 보였다. 흙먼지가 묻은 검은 가죽 구두에서부터 구김이 가 있는 하의를 지나 무겁게 주먹을 쥐고 있는 손을 거쳐 시선을 더 들어올렸다. 바닥을 내려다보듯이 고개를 숙인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
드물게 걱정이 묻어나는 말을 내뱉었다. 그것이 스위치라도 된 듯 카라마츠는 천천히 이치마츠와 눈을 마주치려 얼굴을 틀었다.
그를 만난 이래로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그 날, 12개월쯤 후에 이 곳을 나갈 거라고 이치마츠에게 밝혔다. 이치마츠는 그의 선고를 듣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카라마츠의 계획을 아는 것은 카라마츠의 수하들과 이치마츠 뿐이었다. 카라마츠는 주도면밀 하게 차근차근 준비를 했고 그가 배신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치마츠조차도 의문이 들 정도로 조용히 숨죽여 움직였다. 이윽고 1년이 지나, 카라마츠는 스스로가 한 말대로 이치마츠의 패밀리를 떠나 자신만의 새로운 패밀리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배신이라고 말했다. 이치마츠는 그 말이 모순이라고 생각했지만 부러 정정하지는 않았다. 카라마츠가 데려간 대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가져간 자금은 카라마츠 본인의 것이었다. 현재 도시의 최고층으로 유명세를 달리하는 건물조차도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에게서 훔친 것이 아니라, 이치마츠가 그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자기 소유를 가지고 떠났으니 이치마츠로서는 달리 트집 잡을 근거도 없었다. 모두가, 천하의 마츠노 조직의 돈이 배신을 당했다고 떠들어 댔으나 이치마츠로서는 그리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쥬시마츠와 토도마츠도 태연자약한 이치마츠의 태도에 놀라 어리둥절해했다. 그리 큰 일은 아니잖아. 새로운 조직원이나 모집하면 되지. 그런 식으로 덤덤하게 행동했으나, 이치마츠 본인이 느끼는 바와는 다르게 세간에는 이미 그 이치마츠를 배신했다며 엄청난 루키로서 카라마츠는 주목을 받았다. 아니, 이미 이치마츠의 아래에서 활약할 때부터 카라마츠는 유명했다. 이치마츠의 충견이라느니 빈정거림이 가득한 호칭을 받고도 그는 그 호칭이 맘에 든다고 더욱 열심히 했다. 그 때부터 이미 카라마츠는 그 이름만으로 통하는 사내였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떠난 것은, 이를 테면 카라마츠의 자립하기나 다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미새이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런 생각에 코웃음 치며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빠져버린 구멍을 메우기 위해 꽤 분주히 돌아다녔다. 제아무리 당사자가 배신이 아니라고 느껴도 객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치마츠는 배신 당한 것이었다. 그래. 암만 배신이 아니라고, 혼자서 고집을 부려도 배신은 배신이었다. 적어도, 이치마츠의 신뢰를 져버리고 떠났으니 배신이 맞았다. 유능한 수하를 잃었다는 것에 대한 한 톨만큼의 아쉬움은, 1년 후 카라마츠가 기록적으로 단기간에 도시의 유력한 조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폭풍처럼 몰아치는 노여움으로 바뀌었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수하로 있었을 때, 그는 엄연히 따지면 이치마츠 제 자신의 소유였던 것이다. 허락이 아닌 통보를 고하고 제멋대로 나가버리다니 이 얼마나 버릇이 나쁜 애완견인가.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만 하는 자리에서 저에 대한 태도가 그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수시로 저와 만나려 들고 자기 거처로 초대하는 그의 행태에, 이치마츠는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나빠 이후부터는 아예 그를 무시하기로 작정했다.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지만-애당초 카라마츠는 눈에 띄는 타입인지라-, 최종적으로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눈치를 살피면서 호출하는 빈도가 줄었으므로 어찌 보면 성공한 셈인지도 몰랐다. 근본적으로는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하지만 앞선 이야기들은 전부 한 때의 옛날 이야기이다. 이제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간주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과거의 연관성이 있는 인물일 뿐, 지금은 말 그대로 비즈니스 파트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다음 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요즘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신 갱단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건 마츠노 패밀리와…”
“우리, 우리! 우리 오소마츠 패밀리!”
안 그래도 시끄럽게 조잘대던 주둥이가 더욱 목소리를 키우니 무관심을 고수하려던 이치마츠도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오소마츠는 신호등을 건너는 아이가 되기라도 한 양 번쩍 팔을 들어 손을 뻗었다. 쵸로마츠가 아주 잠깐 곤혹스러워 하다가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네, 오소마츠 패밀리가 처리하기로 했죠.”
“아~ 그런데 말야, 그 건 카라마츠에게 넘겨주기로 했어.”
“하아?”
어리둥절한 쵸로마츠를 대신해 소리를 낸 건 이치마츠였다. 이치마츠가 눈썹을 엇박자로 그리며 오소마츠에게 눈을 치떴다. 오소마츠는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태평한 반응을 보였다.
“장난하나 오소마츠?”
“아~아~ 화내지마 화내지마. 카라마츠 쪽에서 짭짤한 제안을 해와서 말이지.”
오소마츠는 한 쪽 눈을 감아 윙크를 하면서 상쾌하게 웃어 보였다. 그걸 보는 이치마츠로서는 당장이라도 그 목구멍에 총구를 박아 넣고 싶었다. 실실 웃음을 흘리는 오소마츠를 노려보다가 문득 이치마츠는 고개를 돌렸다. 카라마츠야 언제나 거의 항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저만 바라보니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카라마츠는 양 쪽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리며 이치마츠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낯짝에 염증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이치마츠는 다시 오소마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에 무슨 반응을 취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전적으로 패밀리의 수장인 이치마츠의 태도에 달려 있었다. 토도마츠와 쥬시마츠가 조금 진지한 분위기로 장내 흐름을 살피는 사이, 이치마츠는 이마에 돋은 힘줄을 가라앉히려 애꿎은 시가만 고문을 가하듯 악물었다. 보아하니 사전에 전부 얘기를 해둔 듯 했다. 괘씸하기 짝이 없다. 카지노 역시 제가 차지할 요령으로 미리 손을 써두고 실행에 옮긴 것이고 더불어 오소마츠와의 협력 건도 미리 작당을 한 것이 아닌가. 완전히 노리고 왔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치마츠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통을 삼키며 까드득 이를 갈았다.
“미안하다니까. 자! 그럼 이건 어때? 이번은 확실히 내가 약속을 져버린 거니까, 사과의 의미로 꼭 좋은 선물을 보내줄게! 그러니까 화 풀어 이치마츠~ 내 안목 믿지? 난 살아있는 송아지나 최음제가 든 와인 같은 거 안 보낼 테니까~”
일부러 시선을 피해도 대놓고 저를 관찰하는 맞은 편 멍청이만큼이나 오소마츠는 이치마츠에게 성가신 존재이나, 그나마 이 장내에서 가장 편한 상대이기도 했다. 그런 그였기에 흔쾌히, 이런 정부의 뒤치다꺼리나 진배 없는 일에 함께 나서려고 한 것인데. 더불어 무기상으로 유명한 오소마츠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다지기 위함이라는 잿밥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갑작스러운 업무파트너의 교체는 곤란했다. 하지만 오소마츠는 잇속을 잘 따지는 유형인지라, 제게 득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뒤돌아서는 사람이었다. 이치마츠가 잡는다고, 설사 사정 사정을 한다고-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결정을 물릴 자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이번에 둘이 맡은 일은 도시의 무법지대를 조금이라도 통제 하에 두고 싶은 정부가 의뢰해 온 것으로 매 번 의뢰가 들어올 때마다 무작위로 조직을 선정하여 일처리를 맡기는 것이었고, 이번 담당은 전적으로 마츠노 패밀리였다. 오소마츠 패밀리는 이치마츠가 파트너로 선택한 것일 뿐 언제든 거절할 수 있었고, 만약 오소마츠가 거절했다면 빈 자리 그대로 내버려둔 채 이치마츠의 조직이 총 책임을 지거나 혹은 다른 조직을 파트너로 선택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웬만해서는 번거로운 일이기에 조직들은 자기네 순번이 아닌 이상은 참여하려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함께 날뛰어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흔쾌히 수락했던 오소마츠는 분명 이치마츠와 함께 일을 하면서, 이치마츠가 그러했듯, 다른 잿밥에 더 눈독을 들이고 있었을 터였다. 작년에 이치마츠의 패밀리에서 인수한 무기 공장은 암암리에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고, 무기상이자 정보상인 오소마츠는 인수 사실을 알고 굉장한 흥미를 보였었다. 합동작전을 펼친 뒤 분명 오소마츠는 그가 관심을 가지는 공장에 대한 정보나 혹은 운영권에 대해 물어올 거라 생각했다. 당시 인수 사실을 들은 오소마츠가 직접 이치마츠에게 전화를 걸어올 정도로 굉장한 흥미를 보였기에, 그 공장을 놓아버린 것이 믿기지 않았다. 오소마츠가 이 자리를 포기하게 만들다니 대체 뭘 제의한 거지? 이치마츠는 제게 쏠리는 시선들에 결국 험상궂게 미간을 구겨버렸다. 카라마츠처럼 자발적으로 일을 도와준다고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히려 이치마츠 쪽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겨야 하는 상황인 것이지만, 이치마츠로서는 영 뒤가 구렸다.
아무리 과거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어도, 비즈니스 파트너로서도 카라마츠는 가까이 하고 싶은 인물이 아니었다. 눈치챈 사람은 이치마츠를 비롯한 토도마츠와 쥬시마츠 등 마츠노 패밀리의 상층부에 지나지 않지만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만천하에 공개되어 비웃음을 살 것이 분명한 비밀 때문이었다. 적어도 마츠노 패밀리에서 카라마츠 패밀리가 차지하는 지분은 이제는 더 이상 눈 감고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게 되었다는 비밀. 이미 거래의 절반 가량을 그들과 하고 있는 실정에 다른 조직들과의 거래도 알고 보면 어떻게든 카라마츠가 연관되어 있었다. 이 이상 카라마츠 패밀리의 지분이 패밀리 내에서 커진다고 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직까지는 카라마츠 쪽에서 어떤 언급도 언질도 없지만, 이대로 계속 가다간 마츠노 패밀리는 카라마츠 패밀리의 영향권으로 떨어질 터. 저보다도 훨씬 작은 몸집의 조직에게 조종당한다는 굴욕은 있어선 안됐다. 이번엔 뭘 노리고 접근하는 것인가. 용의주도하게 미리 준비를 해놓은 그 발칙함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불편한 의사를 쉬이 내비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카라마츠와의 협력을 거절해봤자, 아까 꼬리를 내렸던 두 명의 헛소리에 힘을 실어줄 뿐이었다.
이치마츠는 시가를 빼내 거칠게 책상에 비벼 껐다. 그리고는 짧게 툭 뱉었다.
“마음대로 해.”
그 대답에 오소마츠는 즐겁다는 듯이 코 밑을 손가락으로 비볐고 카라마츠도 만족스럽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테이블로부터 몸을 뒤로 빼낸 이치마츠는 그 꼴이 보기 싫어 눈을 감고는 모자로 얼굴을 덮었다. 편한 대로 다리를 꼰 다음, 손 깍지를 껴서 뒤로 넘기고는 베개처럼 머리를 비곤 잠을 청했다. 이번에는 토도마츠에게서 아무 말이 없었다. 조용한 장내에 다시 쵸로마츠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이치마츠는 의식을 저 멀리로 날리려고 노력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쾌함 때문에 쉽지는 않았다.
노기가 끓는 게 당연했다. 당장이라도 테이블 위로 뛰어들어 그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아 입술에서 피가 흐르게 하고 싶거늘, 그 와는 정 반대의 감정도 일어나는 것이 참 통탄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잖은가. 그가 제게 다가오는 모든 전략과 행위들은 전부 이치마츠 본인이 그에게 가르친 것이었다. 심심풀이나 다름 없는 사육이었는데 어느새 정이 들어버린 것인지, 잘 배운 것도 모자라 스스로의 스타일대로 지략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랑스러움이 고개를 드는 모순이 일었다.
이 무슨 우매한 감정이란 말인가. 그는 저를 등지고 떠나간 배신자에 지나지 않는 것을.
돈. 짧고 굵은 목소리가 들린 탓에 이치마츠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청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장내는 회의가 끝났는지 하나 둘 사람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치마츠는 천천히 모자를 잡아 내리며 뻑뻑한 눈가를 몇 번이고 찡그렸다. 고개를 들자 난감해하는 토도마츠와 그저 엷게 미소를 짓는 쥬시마츠의 얼굴이 보였다. 이치마츠는 젖은 안개처럼 의식을 덮쳐오는 피곤함에 미간을 찌푸리며 제 머리 위로 모자를 얹고는 입을 열었다.
“먼저 가 있어.”
제 입에서 무슨 말을 할 지 예상했는지 별 다른 반응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쥬시마츠와 토도마츠는 심심한 표정을 하고서는, 하지만 뜬 굼벵이마냥 느리다 못해 스로우모션을 하듯이 움직였다. 이치마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마당에 너희만큼이라도 내 뜻대로 움직여줘야지. 달래듯이 둘의 이름을 연거푸 부르면 결국 둘은 마지못해 문으로 나갔다.
쥬시마츠와 토도마츠 마저 장내를 빠져나가니 남은 사람은 이치마츠와 카라마츠, 그리고 쵸로마츠 뿐이었다. 카라마츠는 문 앞에서 쵸로마츠와 뭔가 긴밀한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이치마츠는 심기가 불편한 제 입이 심심해 하는 것을 깨닫곤 새로운 시가를 찾았지만 입에 시가를 넣어줄 수하가 없었다. 불편한 심기로 가만히 카라마츠가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곧 쵸로마츠마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나갔고, 그 다음은 자연스레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에게로 몸을 돌렸다.
자, 이치마츠. 입은 열지 않았지만 눈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파르르 눈가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로 모두가 내려간 최상층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제 앞으로 다가오자 앞장섰다. 이치마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곤 그 뒤를 따랐다. 다른 층들과 다르게 이 꼭대기 층에는 문이 몇 개 없었다. 제일 큰 남색 문이 아까까지 회의장으로 사용하던 응접실, 그 외에 창고나 몇 개의 빈 방들이 있고 건물주 취향의 옷들이 가득한 드레스룸이 두 개. 그리고 새하얀 색 의 문 하나가 바로 건물주의 방.
이로써 이치마츠가 이 호텔 건물주의 자택에 발을 딛는 것은 세 번째가 되었다.
*
오늘 하루 이치마츠의 계획은 완벽히 틀어져버렸다. 아무 소득 없는 빈 손으로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상대와의 외나무다리 행이 결정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못내 이치마츠의 인내심을 꺼뜨렸다. 제 집 안방마냥, 주인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시야에 들어오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운 채 다리를 꼰 이치마츠는 천장만 노려보았다. 그런 저와 다르게 카라마츠는 기분이 좋은지 간간히 끊길 것 같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겉옷을 벗었다. 그와 자신의 기분 차이가 또 간신히 잠재운 화에 불을 붙이기에, 화를 다시 잠재울겸 이치마츠는 들으라는 냥 이를 갈았다. 애당초 이 방에 들어올 생각이 없었다. 들어와선 안됐다. 어쩌다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쯤 되면 완전히 그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이 뼈저리도록 스스로를 질책하기에, 이치마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화풀이조차 할 수 없었다.
“이치마츠, 내가 보낸 선물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나던 공간에 목소리가 울렸다. 카라마츠는 이제는 아예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느새 이치마츠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의 웃음이 진득한 얼굴보다도 그가 내뱉은 말에 어이가 없어서 이치마츠는 눈을 모로 뜨고 이를 드러냈다.
“말이라고 하나?”
“아쉽군. 매우 값진 와인이었는데 말이야. 내가 직접 시음해 보고 골랐던 거라 맛과 질은 보증한다고. 정말 아쉬워. 한 번이라도 맛봤으면 좋았을 텐데.”
“Non posso crederci.(기가 차네) 한 모금만 마셔도 발정 난 수캐처럼 몇 날 며칠을 허리만 흔들게 되는데?”
두 개의 배럴을 선물이라는 이름의 쓰레기 처리로 보내버린 뒤, 낱개로 든 병 하나를 따서 최고 말단 한 명에게 먹였다. 처음에는 자기가 먹어본 와인 중 최고라며 들떠서 이치마츠에게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하던 그는 곧 두 시간쯤 지나니 몸이 발열하고 더불어 중요부위가 부어 올랐다. 미친 듯이 헐떡이며 허리를 뒤트는 그 모양새에 이치마츠와 토도마츠는 얼굴을 구기며 급하게 패밀리 산하의 매음굴에 그를 던져놓았다.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울며 전화하는 말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치마츠는 꽤 괜찮은 거액과 포상을 내려주어야만 했다. 토도마츠는 악질이라며 치를 떨었고 쥬시마츠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치마츠로 말할 것 같으면 이제 아무 감흥이 없었다. 이런 장난 같지 않은 짓거리만 벌써 여덟 번 째였다. 선물이랍시고 카라마츠는 별의 별 것들-주로 성(性)쪽으로 관련된 것들이었다-을 보내왔고 이치마츠는 그 대부분을 그냥 버렸다. 장난이라기엔 카라마츠는 진심이었고, 그렇기에 그의 희롱하는 듯한 선물들에 대해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아무리 더럽고 상상 이상의 일이 대부분이라는 뒷세계라지만 그렇기에 자존심이니 명예니 하는 것들을 중요시 여기는 곳이었다.
“과장이 심하잖아. 한 모금이면 6시간 정도 후에 효과가 사라진다. 그 정도면 자양강장제로는 아주 탁월하지 않나?”
안 그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혈색 좋은 두툼한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걸 눈에 담으며 이치마츠는 눈가를 찌푸렸다.
“장난치자는 게 아니다 카라마츠.”
“너야말로, 나의 시리어스한 진심을 알아주지 않겠나 이치마츠.”
이치마츠는 꿋꿋하게 제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는 카라마츠를 노려보다가 결국 제가 먼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라던가 언변만큼은, 옛날에도 눈 앞의 사내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가 제 다리 옆에 앉는 것을 곁눈질하며 이치마츠는 저도 모르게 굳어버린 몸의 긴장을 풀었다.
“원하는 게 뭐야.”
“거래를 원해, 이치마츠.”
기다렸다는 듯이, 미끄러지듯이 흘러나오는 대꾸에 이치마츠는 얼굴을 구겼다.
“지금, 누가 누굴 상대로 거래를 하려는 거야?”
“당연히, 고져스한 ‘이치마츠’에게, 이 ‘카라마츠’가지!”
“Porca miseria.(빌어먹을 자식)”
“논논, 심한 말은 자제해주겠어?”
카라마츠는 아주 단순한 움직임으로, 이치마츠의 연한 회백색 구두에 손가락 끝마디를 얹었다. 가벼운 솜털이 얹어진 듯 올려진 손가락은 천천히, 물 위에 뜬 깃털처럼 아주 가뿐한 움직임으로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양말과 신발의 가죽이라는 장벽이 있음에도 이치마츠는 제 발등 위로 그의 손가락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괜찮다면 카지노를 넘겨주겠다. 갱단의 처리도 온전히 내가 맡도록 하지.”
무광 가죽의 가운데를 지나 검정색의 끈이 교차하고 있는 곳을 넘고 끝에 도달하자 양말 위로도 불툭 튀어나온 복사뼈가 눈에 들어왔다. 카라마츠는 바지 끝단과 양말 사이로 드러난 맨 살에 눈을 두었다. 신발의 발목 끝 위에 있던 손이 떨어지고 바지의 천에 닿으려는 찰나, 카라마츠의 무릎으로 무언가가 들이밀어졌다.
카라마츠는 애처로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눈을 돌렸다. 이치마츠는 여전히 누워 있는 채로였지만 시선만큼은 무서우리만치 카라마츠에게 꽂혀있었다. 카라마츠가 머쓱하게 손을 내리자 그의 무릎에 총구를 붙이고 있던 이치마츠의 손도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서 어쩔 텐가?”
거래에 응하면 카지노 설립 건도 넘겨주고 심지어 성가시기만 한 허드렛일 역시 저쪽에서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무슨 꿍꿍이 셈이지. 그런 의문을 떠올리다가도 이치마츠는 스스로의 아둔함에 혀를 내둘렀다. 무슨 속셈이긴. 이미 훤히 다 알고 있는 주제에.
이치마츠는 그가 무슨 속셈인지 5년 그 날 밤부터 알고 있었다. 5년 전, 패밀리를 떠나겠다고 카라마츠가 선언한 날이자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에게 제 마음을 고백한 날부터.
카라마츠는 바닥으로 늘어뜨려진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 올렸다. 여전히 손아귀 안에 쥐고 있는 총이 엄청난 위압감을 흘리고 있으나 그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는 부드럽게 입술을 휘었다.
“이치마츠, 너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다.”
손등에 입을 맞추는 카라마츠의 입가엔 얼핏 성취감 같은 것이 맺혀 있었다.
*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카라마츠에 이치마츠는 억지로 수마를 쫓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한 번 쓸어 내리고, 이치마츠는 등받이 너머로 팔을 넘겼다. 카라마츠. 방 안을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는 목소리의 주인치고는 굉장히 부드러운 편이었다.
‘왜 그래?’
카라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기울여 한 쪽 무릎을 소파에 기대고 팔 한 쪽은 이치마츠의 머리 옆을 짚었다.
이치마츠의 위로 카라마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치 이치마츠를 소파와 제 사이에 가둔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이치마츠는 말없이 카라마츠가 하는 냥을 지켜보았다. 카라마츠는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찬 눈동자를 일렁이며 이치마츠를 내려다보았다.
방안은 고요함으로 가득 찼고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이윽고 카라마츠가 자유로운 팔을 움직였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이치마츠의 볼에 닿았다. 푸석하지만 부드러운 볼을 손 안에 담고 카라마츠는 비장한 얼굴로 상체를 더욱 굽혔다.
‘카라마츠.’
카라마츠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 언젠가 들었던 것보다도 차가운 목소리에 그는 쓰게 웃었다.
이치마츠는 잠이 달아났는지 첨예한 시선을 달고 카라마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그의 볼을 담고 있던 손바닥을 떼어 닿을 듯 말 듯 아주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볼을 쓸었다.
‘돈. 아니, 이치마츠, 나는, ‘
‘적당히 해라.’
잔인하리만치 단호한 답이 떨어질 것은 예상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눈 앞에 두고 마주하자니-, 카라마츠는 무너져 내리려는 얼굴근육을 막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너를 가질 수 있지?’
꼴사납게 목소리가 떨리는 것만은 간신히 막았지만 이미 표정은 일그러진 지 오래였다. 카라마츠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간절하고 다급하게 이치마츠를 불렀다.
하지만 카라마츠의 양 팔 사이에서 카라마츠를 올려다보는 이치마츠는,
‘분수를 알아야지.’
그렇게 차가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분노나 혐오와 같은 어떤 감정을 담고 있다면 좋으련만, 이치마츠는 무표정하고 무감각하게 카라마츠에게 선고를 날렸다. 카라마츠에겐 확인사살이나 다름없는 말을. 그리고는 마치 반응을 기다리는 것처럼 카라마츠를 예의주시했다.
카라마츠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슬픔을 삼키곤 입술에는 미소를 걸친 채로 이치마츠를 눈에 담았다. 가슴이 갈갈이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이지만, 이렇게 거절당하는 것조차 그의 예상범주 안이었다.
카라마츠는 몸을 숙여 이치마츠의 귓가에 속삭였다.
‘돈. 알다시피, 난 인내심이 강한 남자다.’
그러고는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이치마츠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속삭이듯이 중얼거렸다. 약 1년간의 기간이 지난 후 독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마피아의 세계에서 한 번 패밀리의 산하로 들어간 이상 패밀리를 벗어나겠다는 선택지는 패밀리가 괴멸한 상태가 아닌 이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배신하겠다는 선언을 참 당당하게도 말하는구나. 문을 열고 나가려는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목소리에 멈칫하더니 그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취침을 방해해서 미안하다, 돈. 좋은 꿈 꾸길.’
언제나와 같은 평범한 인사치레가 돌아와서 이치마츠는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조용히 닫히는 문지방을 지켜볼 뿐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이치마츠는 태어날 때부터 총알이 쏟아져 내리는 세계에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필수적으로 타고날 수 밖에 없었던 감각은, 쌓이고 쌓여 예리한 감각들이 되어 세간에서 말하는 육감이 되어 이치마츠에게 위험을 알리곤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이치마츠는 이성보다도 감각적으로 알아차렸다.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이치마츠도 그리고 그 당사자도 모를 터였다. 그저 어느새 눈치를 채고 나니 카라마츠는 열렬한 시선으로 항상 이치마츠를 쫓고 있었고 이치마츠는 그런 카라마츠를 늘 의식하고 있었다. 우연히 만난 길 잃은 강아지를 주워 어느덧 늠름한 사냥개로 개화시킨 것은 이치마츠가 생전에 처음 맛본 즐거움이고 기쁨이었다. 제 말을 따르는 수하는 널리고 널렸으나 다른 그 어느 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정말 오로지 이치마츠만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단순하고 머리 나쁜 수족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아꼈는지도 몰랐다. 오로지 윗사람과 아랫사람만이 존재하던 이치마츠의 인간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대등한, 어쩌면 ‘친구’라고 부를 수도 있을 존재는 카라마츠가 처음이었다. 카라마츠는 마치 각인 당한 동물마냥 이치마츠를 따랐고 이치마츠 역시 카라마츠만 특별취급을 해주었다. 그래서였는 지도 모른다. 고작, 제게 장난을 쳐도 받아주었을 뿐인 그런 사소한 취급 때문에 그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색으로 물들어 버린 것은.
카라마츠의 감정을 깨달은 이치마츠는 달리 별다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카라마츠는 적정선 이상을 넘어오지 않았고 그렇기에 이치마츠가 달리 나서서 그를 제지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 선 밖에서 저를 애타게 바라보는 카라마츠의 시선을 느낄 뿐 사실상 이치마츠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없었다. 굳이 나서서 그의 감정을 묵사발 낼 필요도, 혹은 그의 응석을 받아주며 희망을 선사할 필요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카라마츠가 제 자신에게 갖는 그 감정의 선상에서, 이치마츠의 감정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이치마츠가 카라마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신분 상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있었다. 카라마츠의 감정의 행방은 이미 결말이 뻔한 이야기였다. 조직의 보스와 그 보스의 충견, 바뀌지 않을 그 관계 속에서 카라마츠가 가질 지 모르는 긍정적이고 행복한 결말은 존재할 수 없었다. 패밀리의 보스라는 직위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이치마츠는 그 자리의 무거움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이치마츠가 지금의 자리에서 내려오거나 카라마츠가 이치마츠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은 마주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취향도 성격도 모든 게, 좋게 말하면 독특하고 나쁘게 말하면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수준이 낮을 줄은 몰랐다. 온갖 임무와 인연 속에서 만나온 미인들은 어디로 다 제쳐두고, 항상 임무를 주어 생과 사가 갈리는 죽음의 길로 보내는 저 같은 쓰레기를 마음 속에 품을 줄은 이치마츠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카라마츠도 완전한 바보는 아니기에 섣불리 다가오지 않는 그를 보며 이치마츠는 속으로 전할 수 없는 칭찬을 해주었다. 그래. 바라보는 것쯤은 나무라지 않을 생각이었다. 계속 그 자리에서 그저 곁에 서서 저를 보는 것쯤이야, 그런 것쯤은 언제까지도 몇 번이고 허락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 카라마츠가 직접 부딪혀 올 거라고는, 이치마츠는 한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당황스러움보다는 절망감이 컸다. 겉으로는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침울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치마츠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카라마츠를 거절할 자신을 카라마츠는 알고 있고, 또 그렇게 거절당한 그는 제 옆을 떠나리라는 것을. 친구 같았던 존재를, 형제와도 견줄 수 없던 존재를 잃게 되는 것이었다. 이치마츠의 작은 세계 속에서 단 하나 뿐이었던 관계를 잃게 되는 것은, 아무리 냉혈한이라고 불리는 조직의 수장이어도 슬픈 일이었다. 차근차근 제 곁을 떠날 준비를 해나가는 카라마츠를 볼 때마다 이치마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원래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걸까 했던 의문을 지우고, 여전히 이 쪽에 남으려는 듯한 카라마츠에 앞으로 마주할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했다. 훌륭하게 배신을 하고 독립을 한 뒤 다시 만난 카라마츠가 여전한 태도와 여전한 감정으로 저를 대하는 것을 보고 충분히 신기하고도 멍청한 녀석임을 확신했고 그의 말마따나 끈질기다는 것을 확인했다.
변치 않은 사랑을 품고 그는 맹렬하게 이치마츠의 뒤를 쫓아 마침내는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선물로 주었던 빌딩을 증축하여 도시의 랜드마크로 만들고 돈을 모았다. 차고 넘치는 돈으로 정보를 끌어 모았고 모은 정보를 통해 또다시 돈을 불리고 다른 조직들과 관계를 형성해 나가며 천천히 조직의 몸집을 불렸다. 커진 몸집을 토대로 마침내는 노리던 목표물에게 다가가 천천히 자신의 이빨을 박아 넣어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했다.
그리고는 참 취향 나쁘게도, 귓속으로 살살 불어넣는 것이다. 절대로 뿌리치지 못할 달콤한 제안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이치마츠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놀라기보단 굉장히 언짢아진 기분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제정신이냐?”
“이치마츠, 아까부터 그런 섭섭한 말을……”
칭얼대듯이 눈썹을 늘어뜨린 그를 보며 이치마츠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미 지금 상태만으로도 카라마츠 패밀리는 이치마츠의 패밀리에게 있어서 도시 내외의 그 어떤 조직보다도 위험한 존재였다.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존재이지만 카라마츠는 폭력적으로 거리를 좁히며 다가온다. 그가 해온 모든 행적들이 전부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이라면, 그런 것이라면 이치마츠에겐 선택의 방도가 없었다.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지. Essere per fòrza.(아니고 말고)”.
확신에 차 뱉는 말에 카라마츠는 처진 눈썹을 치켜 올리며 웃어 보였다.
“다만, 그래. 제정신이라고 할까, 지금의 난 그 누구보다도 침착하다. 이치마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상황, 그걸 만들어낸 것은 오로지 카라마츠 본인의 지략이었다. 이치마츠는 그런 것을 가르친 기억이 없다. 오로지 저 하나를 바라보며 달려온 카라마츠. 기어코 거물급 명단에 이름을 올려 저와 같은 선상에 서게 된 카라마츠. 단순히 인내심이 강하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일까? 지금의 제안을 거절한다 하더라고 카라마츠에게는 아직 많은 수가 남아있을 터였다. 이는 곧, 카라마츠는 지금 이상으로도 이치마츠를 압박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단단히 잘못 걸렸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아귀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이치마츠는 거북한 심정으로 손에서 힘을 뺐다.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방은 총이 떨어지는 소리를 삼켰다. 총의 빈자리를, 카라마츠의 단단한 손이 차지했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는 누구보다도 내 스스로가 잘 알고 있어. 이치마츠, 난 지금 내 평생 가장 기쁘다. 드디어 내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야.”
이 모든 걸 초래한건 스스로가 아닐까. 이치마츠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카라마츠의 손이 제게 닿는 걸 쳐다보았다.
카라마츠의 신생패밀리를 왜 진작에 뭉개버리지 않았나. 왜 그가 하는 사업을 방해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가. 의도가 뻔한 그의 장난질에 왜 응징하지 않았는지. 제대로 그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왜 그의 초대와 부름에 응했는지.
카라마츠가 몸을 붙여왔다.
체념과 실의에 빠져 찌푸려지는 이치마츠의 눈꺼풀 틈새로, 만족스럽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보였다. 이치마츠는 눈을 감아버리고 귓가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잘게 몸을 떨었다.
“나는 지금, 매우 기분이 좋아.”